[영화선우] “어쩌면 말이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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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임신 8개월이었던 배우 샤론 테이트가 악마를 숭배하는 집단에 의해 살해됐다. 배후는 ‘20세기 최악의 살인마’로 불리는 찰스 맨슨이다. 그의 일당 ‘맨슨 패밀리’는 샤론 테이트의 집에 몰래 들어가 샤론 테이트와 그의 지인들을 살해했다. 이들은 범행 당시 태아만이라도 살려달라는 샤론 테이트의 애원을 무시하고 잔인한 범행을 저질렀다.

애초 이들이 겨냥한 건 찰스 맨슨의 데모 음반 테이프를 혹평한 음반 제작자였다. 그 제작자가 떠난 줄 모르고 이 집에 찾아갔다가 샤론 테이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을 모두 살해했다. 샤론 테이트는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부인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영화 촬영으로 밖에 나간 덕분에 살아남았다. 샤론 테이트 살인사건은 매스컴의 집중포화를 받으며 희대의 가십으로 떠올랐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할리우드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기대보다는 우려가 컸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유혈낭자한 액션 영화로 이름을 떨쳐온 탓에 고인을 욕보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허구의 인물과 실존 인물을 교묘하게 뒤섞어 우려를 잠재웠다.

1969년 LA, 주인공은 한물간 서부극 배우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스턴트 대역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다. 이들은 가상의 인물이다. 실존 인물인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와 그의 남편 로만 폴란스키(라팔 자비에루카)는 릭 달튼의 옆집에 산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특정한 서사를 구축하지 않고 당대 영화계와 사회 분위기, 인물의 면면을 보여준다. 특히 릭 달튼과 클리프 부스에 집중한다. 서부극 주연을 도맡아온 릭 달튼은 서부극으로 피워 올린 황금기가 끝나가는 할리우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조연으로 밀려난 뒤 서러움을 겪다가 주어진 대사에 자신을 겹쳐보며 진정한 연기에 눈을 뜬다.

클리프 부스는 찰스 맨슨으로 대변되는 히피문화에서 주는 공포를 직접적으로 겪는다. 집단 거주하는 히피들의 공간에서 허구의 인물이 겪은 일화로 다소 평이한 전개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샤론 테이트가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모습은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곧 있을 비극을 암시하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러닝타임 161분의 대부분을 릭 달튼과 클리프 부스, 샤론 테이트의 뚜렷한 방향 없는 이야기를 통해 1960년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영화 속 영화, 실존 영화들의 자료화면을 끊임없이 교차하며 영화와 현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막바지 10여 분을 남기고 고어한 시퀀스가 시작된다. 하지만 충격적 결말은 예상과 다르다. 잔혹하지만 통쾌한 액션이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진다.

영화 제목이 과거 할리우드를 시간 여행하듯 ‘옛날 옛적 할리우드에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는 ‘만약 비극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에서 출발했다. 이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사고가 발생하고서야, 사람들이 ‘이렇게 위기를 넘겼다면’이라고 황당한 가정을 하는 것과 같다.

1960년대 할리우드와 히피문화,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샤론 테이트 등 생경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반전에서 통쾌한 감정이 드는 건 대한민국에서 무수한 비극을 겪는 탓에 황당한 상상을 통해서라도 안도감을 느끼고 싶어서가 아닐까. 시간을 돌려 비극을 막고 싶은 판타지를 꿈꾼다는 것은 그만큼 아름답지도 재밌지도 않은 ‘현실’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