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조커’가 드러낸 엘리트 권력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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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3:55 | 최종 업데이트 2019-10-28 13:55

*스포일러 주의

배트맨 영화의 역사로 본다면 최근 개봉한 ‘조커’란 영화의 위치는 좀 애매하다. 배트맨 코믹스를 기반으로 한 서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기보다는 단지 이미지와 캐릭터의 차용에 그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평가에 있어서도 작품 내적인 요소보다는 실제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한 것인지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단적으로 말해 ‘조커’는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이후 자기 확신을 잃어버린 미국인들의 오늘을 보여 준다. 영화는 마치 가난한 백인 노동자 유권자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 같다.

배트맨 시리즈의 배경인 ‘고담시’는 뉴욕시를 모사한 것이라는 게 일반적 견해이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여러 단서로 볼 때 1981년으로 추정된다. 1981년은 뉴욕시에서 실제 시장 선거가 진행된 해이다. 민주당 소속 에드 카치가 재선에 도전했는데 워낙 평가가 좋아 공화당으로부터도 지지를 획득했다. 그는 3선에도 성공해 1989년까지 시장직을 유지했는데, 2004년 대선 때는 조지 부시를 지지했다.

에드 카치는 상징적 인물이다. 2차대전 이후 호황 국면이 끝나면서 찾아온 제조업 쇠퇴와 인종 갈등을 비롯한 전형적 도시 문제를 해결한 장본인으로 꼽힌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그는 인종이나 성적 지향 등 문화적 주제에 대해선 자유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성적 지향에 대한 논란에 휘말렸지만 적어도 정치인으로 역할을 하는 동안엔 명확한 사실을 밝힌 바 없다.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적 인식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한 것이다.

하지만 노동이나 복지와 같은 문제에서는 전형적인 보수파 정치인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지하철과 버스 등 교통 부문 파업이 벌어지자 시민들에게 “(타협할 수 없으니) 차라리 걸어 다니자”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잘 알려져 있다.

에드 카치와 같은 인물이 초당파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가 ‘침묵하는 다수’의 반격이 시작된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20세기 초에 대통령을 배출하고 뉴딜을 거치며 다수파가 된 미국식 혁신주의(progressivism)는 1960년대 이후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을 겪으며 몰락하고 있었다. 혁신주의의 시대는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때까지 억눌려 있던 자본가, 네오콘, 복음주의적 기독교가 손을 잡고 다시 다수파 자리를 탈환한 것이다.

에드 카치의 해법은 최소한 경제적 측면에서 레이건주의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뉴욕시는 재정 절감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금융과 서비스업 중심의 산업구조 고도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뉴욕’하면 떠올리는 바로 그 화려한 광경이다. 이런 일들의 이면에 저소득층 노동자들의 소외와 몰락이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조커’에서 표현하는 고담시의 상태는 바로 이 시기에 맞춰져 있다. 자유주의자로서의 문화적 취향을 과시하며 윤리와 품위를 말하며 시장 선거 출마를 준비하는 금융가 토마스 웨인은 당시 뉴욕시의 주류를 상징한다. 영화 말미에 웨인 가족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이때 노출되는 영화의 제목은 역시 1981년에 개봉한 ‘Zorro, The Gay Blade’이다. 배트맨 코믹스에서 웨인 가족이 피살당하기 전 관람한 영화가 ‘The Mark of Zorro’였다는 설정을 살짝 비튼 것이다.

조로를 주제로 한 영화엔 조로의 후계자나 대리인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Zorro, The Gay Blade’에선 몸을 다친 오리지널 조로를 대신해 ‘게이’인 ‘버니 위글스워스’가 또 다른 조로로 활약한다. 버니 위글스워스는 오리지널 조로의 쌍둥이 동생으로 ‘게이’이다. 마찬가지로 조로였던 현재 조로의 아버지는 그를 ‘남자’로 만들고자 영국 해군에 입대시켰는데, 결과적으로 그의 ‘여성스러운’ 특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주인공들은 ‘게이’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반영한 여러 행위와 사건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즉 이 영화의 내용은 게이-친화적이라기보다는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웃음거리로 활용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이 대목에 주목하면 이 영화에서 토마스 웨인은 민주주의나 인권을 오직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데만 몰두하는 ‘위선적 진보’의 상징처럼 보이게 된다.

총기 소지 옹호론자로부터 권총을 받은 덕에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언제나 다들 그랬던 것처럼 자기를 무시하는 ‘금융맨’들을 결국 쏴 죽이는 주인공의 행위는 이러한 기만적 자유주의가 해결을 거부한 문제에 대한 대중의 복수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이 결국 ‘조커’가 되고 대중적 복수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는 장면은 포퓰리즘이 세계를 휩쓰는 현실을 연상하게 한다.

영화와 현재의 접점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요소는 흑인 캐릭터들의 지위에 관한 것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의료와 관계가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대개 흑인인데, 이들은 주인공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정적 대목에서 다양한 이유로 주인공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다.

착각과 망상 속에서 주인공과 사랑을 나누고 기득권 일반에 대안 없는 증오를 부추기는 여성 역시 흑인인데, 환상이 깨지고 나서 주인공은 흑인 여성이 함께 르상티망을 공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피해를 입히고 있는 대상임을 자각한다. 같은 구도가 영화 초반부 주인공이 버스 안에서 흑인 모녀와 겪는 일에서도 반복된다. 이러한 주인공과 흑인 캐릭터들과의 거리감은 오바마 정권에 대한 백인 노동계급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면 주인공이 처해있는 문제는 해결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자유주의 통치의 한계 때문에 노동권이나 복지제도 등을 통한 보편적 차원의 구제는 기대할 수 없다. 주인공은 어머니와 토마스 웨인과 관계에서 자신이 구제받아야 할 특수한 이유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으로 공동선에 기여해보려고도 했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에 남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될 뿐이다. 기득권은 이런 자신을 이해하거나 수용하는 게 아니라 경계하며 꾸짖을 뿐이다.

그러니 남은 건 범죄를 저지르며 기득권 일반에 대해 반감을 갖는 대중에 편승하며 ‘관심’을 획득하는 거로 자존감을 채우는 것뿐이다. 매스미디어는 충격적 비극의 현장조차 관심거리로 소비하며 이를 더욱 부추긴다.

이런 점에서 영화 ‘조커’는 대중투쟁을 결코 호의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거리로 뛰쳐나온 광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에 항의하고 있으며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 그렇다. 주인공의 살인이 기득권에 대한 복수로 받아들여지는 맥락도 알 수 없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웨인 일가 앞을 지나는 시위대의 피켓에는 ‘RESIST(저항하다)’라는 문구가 거꾸로 적혀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영화 제목과 주인공이 ‘조커’이므로 배트맨이 나설 수밖에 없다. 시위대에 총격을 당해 쓰러진 웨인 부부의 사이에 어린 브루스 웨인의 실루엣이 비치는 장면은 이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미래의 배트맨이 어떤 의미의 활동을 하게 될지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트맨 서사에서 ‘조커’라는 악당은 대개 배트맨의 활동으로 만들어 진다. 뭔가 좋은 의지를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다 오히려 악을 키우게 된다는 클리셰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영화에 등장하는 조커의 “You complete me(니가 날 완성시켜)”라는 대사는 이 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팀 버튼의 배트맨 영화에선 조커가 되기 전의 잭 네이피어가 웨인 부부를 살해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가 조커가 됐다는 사실을 배트맨이 알게 되는 것은 영화의 중반부를 넘어간 시점이다. 즉, 여기서도 배트맨의 자경단 활동은 범죄자로부터 부모가 살해당했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지 조커의 현실적 위협이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영화 ‘조커’에서는 명확하게 조커라는 사회적 문제가 배트맨 활동의 원인이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배트맨은 무엇을 해야 할까? 팀 버튼 영화에서 배트맨은 악질 범죄자를 추적하는 탐정에 불과하다. ‘배트맨 리턴즈’에서 사건의 진정한 원인인 자본가에게 복수를 하는 주체가 체제에 무관심한 배트맨이 아닌, 체제의 직접적 피해자인 캣우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에서 배트맨은 초법적 수단을 동원해 도시를 통치하는 권력자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 ‘조커’의 광대들은 이제 사회적 문제이다. 때문에 ‘조커’의 배트맨은 후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서사는 포퓰리즘에 대한 대안으로 엘리트주의의 통치를 요구하고, 다시 엘리트주의의 부패와 사익추구를 해결하기 위해 포퓰리즘을 호출하는 현실 정치의 기만성을 확인하게 한다. 배트맨이 조커를 만들고, 다시 조커가 배트맨을 만드는 일의 연속이 되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대안적 정치를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 ‘조커’가 바라보는 곳은 이 방향이 아니다. ‘조커’가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배트맨이라는 초법적 권력의 불가피성 같다. ‘Zorro, The Gay Blade’라는 장난 같은 얘기는 그만하고 엘리트 권력의 민낯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탈출구 없는 미국 정치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이단아적 권력자의 맞수로 민주당이 고려하는 인물이 조 바이든에서 엘리자베스 워런으로 요동치는 현상이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조커’가 국내에서도 흥행을 거두는 이유 중 하나도 이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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