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방향 잃은 개혁 정권의 한계 / 김민하

10:44

분위기가 흉흉한 걸 넘어 무섭기까지 한 요즘이다. 검찰이 정권의 선거개입 의혹을 수사하는 가운데 주요 참고인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의 실체를 확인해야겠지만, 어떻게 보더라도 청와대가 한 일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접수된 첩보를 이첩하지 않는 게 직무유기라고 했지만, 박형철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이 검찰에 했다는 진술 내용이 보도된 걸 보면 울산시장을 둘러싼 문제에 청와대가 나선 맥락에 어떤 ‘특수성’이 없었던 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목적이다. 청와대가 ‘무리’를 했다면 그 배경에는 부산, 울산, 경남에서의 지방선거 성적이 중요하다는 판단이 있었을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부산, 울산, 경남이 특별히 중요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이것은 대의를 위해서냐 사익을 위해서냐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보수언론은 송철호 울산시장과 문재인 대통령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두 사람이 인권변호사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청와대가 울산시장 선거를 특별히 챙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경찰의 과잉 충성 가능성도 제기한다. 수사권 독립을 숙원으로 하는 경찰 조직이 청와대 기대(?)에 적극적으로 부응한 결과라는 것이다.

사건의 본질이 이런 차원이라면 전형적인 부패 스캔들이다. 그런데 당시 정치 상황을 다시 떠올려보면 이 사건이 다른 것의 전형일 가능성도 제기해볼 수 있다. 2017년 지방선거는 대통령 선거의 연장전처럼 치러졌다. 지금도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촛불혁명’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때는 더 많은 사람이 그런 감각을 유지한 때였다.

자유한국당은 무슨 수를 써서든 당장 눈앞에서 치워야 할 어떤 것처럼 취급됐다. 이런 서사에서 문재인 정권이 ‘피플파워’라면 국회와 지방권력을 장악한 자유한국당은 기득권의 상징이었다. 부산, 울산, 경남에서의 선거 결과가 중요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이 시기에는 권력의 바람과 대중의 기대가 일치했다. 이게 현재 상황을 만든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최근 정국을 뒤흔드는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문제도 마찬가지다. 유재수 전 부시장 문제는 그가 정권이 바뀌고 금융위 요직인 금융정책국장 자리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언론 보도를 보면 유재수 전 부시장은 청와대 주요 인사들과 소통하면서 금융권 인사청탁 등을 실행했다고 한다. 이렇게만 보면 이 역시 전형적인 부패 스캔들이다.

하지만 ‘개혁 정권’의 관료 장악이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관료 사회라는 토대가 변화하지 않으면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에 동의하는 관료를 요직에 두고 관료 조직을 통제하기 위한 인사조치를 실행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유재수 전 부시장에 대한 ‘투서’는 정권의 개혁에 반대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유재수 전 부시장이 자신의 개인 비리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국회 전문위원과 부산시 경제부시장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한다.

그런데 위선자들의 사익 추구와 개혁이라는 대의를 위해 총대를 메는 일은 행위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때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져야 할 법적 책임과 정권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다른 층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만일 정권이 ‘피플파워’를 자처하는 것처럼 개혁에 충실했더라면 범법자들과 정권을 분리해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건과 같은 문제에서 확인한 것은 권력이 개혁의 대의를 자기 사람 지키는 용도로나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근의 사건들도 같은 결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피플파워’를 자처하는 정권이 개혁의 당위를 스스로 배신하는 일들을 보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힘을 얻는 것은 각자도생의 정신이다. ‘촛불혁명’을 통해 정권을 바꿔도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오히려 그 정권이 대의를 이용하기만 할 뿐이라면 결국 각자 현명하게 살아남는 것만 남는다는 거다.

오늘날 이러한 각자도생의 정신은 ‘공정성’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공정성’이라고 해봐야 결국 남을 이길 수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욕망이 반영된 것일 뿐이다. 상황이 달라지면 사람들은 자신들에 유리한 또 다른 기준을 주장할 것이다. 애초에 그런 수단조차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살게 하지만 동시에 죽게 내버려 두는 대상으로만 취급된다. 이 결과 ‘사회문제’는 심지어 인터넷에서의 논의조차 엘리트가 주도한다.

개혁 정권의 한계는 결정적으로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정권의 선거개입 의혹이나 특정 관료 의존과 비호는 부패한 엘리트를 또 다른 엘리트로 교체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의 산물이다. 공정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사람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믿음 역시 엘리트적 해법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이른바 ‘기성정치’와 별 관계가 없이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된다. 이 정권이 관료의 해법을 따르고 대기업에 의존하며 예정된 실패를 답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정권도 똑같이 썩었거나 신실하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렇기에 해법은 우리의 삶을 다시 정치의 한가운데로 돌려놓는 것으로부터 모색해야 할 것이다.

지역에서의, 아래로부터의 실천은 우리의 삶을 정치의 장으로 만들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지면은 소중하지만, 아쉽게도 칼럼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관용어구가 있지만, 이성으로도 낙관한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그간 부족한 글 실어준 뉴스민과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