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가 /이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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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고발하는 것 까지는 되는데, 그 이상을 보여주는 어떤 상상력, 그런 걸 찾기가 어려워요.” 정치적 메시지도 있으면서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찾는 게 참 어렵다는 대화를 나누던 중 상대가 이렇게 말했다. 고발, 그 이상을 보여주는 상상력.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른 세계, 다른 관계,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 담긴 이야기를 갈구한다. 실현가능성 따위는 상관없다. 그저 다른 상상력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상상력은 재능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깝다. 제 억울함에 갇힌 사람은 타인의 입장에 대해 상상하지 않는다. 억울함에 과몰입하면 온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쌍한 줄 안다. 억울함이 폭력성과 결합하는 순간이다.

2시간 동안 페미니즘 강연에서 각종 폭력에 대해 들은 후 ‘군대 다녀온 남성의 억울함은 어떻게 해결하냐, 여자들을 보면 박탈감을 느끼는데 그 감정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집요하게 묻고, 강연 시간이 이미 너무 지체되었다는 다른 진행자의 주의에도 계속 말을 멈추지 않고, 강연이 끝난 후에도 군복무에 대한 보상 문제를 ‘군대 다녀오지 않은 여성에게’ 묻는 남성. 그에게 ‘억울함’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사실 질문이 아니다. 듣고 싶어 묻는 질문이 아니라 묻는 행위를 통해 여성을 괴롭히려는 폭력 행위다.

놀랍게도 이런 행동을 한 사람은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강연을 기획한 사람이었다. 그는 ‘참석자들은 차마 하지 못한 질문’을 자기가 기꺼이 나서서 대신해주는 것이란 말까지 덧붙였다. 이쯤되면 애초에 페미니즘 강연을 기획한 의도가 솔직히 의심스럽다. 정치인들이 제 생각을 말하며 ‘국민을’ 대변한다고 핑계대듯이, 그는 제 감정을 마치 참석자들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양 포장했다. 정작 강연을 들은 젊은 남성은 “성차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며,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꾸벅 하고 나갔다.

흑인 연설가에게 백인이 쫓아다니며 ‘백인의 억울함’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어떨까. 더 이상 노예가 아닌 흑인을 보면 노동자로 살아가는 백인으로서 박탈감을 느끼는데, 이 감정이 옳지 않다는 건 알지만 어쨌든 그런 감정이 생기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라고 흑인에게 집요하게 묻는다면 어떨까. 매우 우스꽝스러운 행동이며 괴롭힘에 해당한다는 걸 더 많은 사람들이 인지할 것이다.

여성들에게는, 정확히 말하면 소위 ‘페미니스트’라고 알려진 여성에게는 이런 ‘감정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내 억울함은 어떻게 할거냐’는 말만 한다. 들을 생각이 없기에 나도 별로 답할 생각이 없다. 군복무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을 위해 국방부에 한 줄의 청원도 넣지 못하면서 여성에게 억울함을 해결할 방법이 뭐냐고 묻고, 묻고, 묻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억울함을 빌미로 지속적인 권력 행위를 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억울함은 폭력의 얼굴이 된다.

▲2006년 뉴욕에서 열린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 추모 행사 [사진=flick.com @houari_b]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은 현대의 미국 흑인 여성이 노예 제도가 있는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타임슬립물이다. 1976년을 살아가는 다나는 백인 남성과 함께 산다. 어느 날 현기증을 느끼며 쓰려진 다나는 160년 전인 1815년 메릴랜드의 숲에서 깨어난다. 다나는 우연히 만난 백인 소년 루퍼스를 구하는데 그 소년은 다나의 조상이다. 다른 시대를 사는 다른 성별과 다른 인종이 혈연관계로 연결된 설정이다. 다나는 루퍼스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살려낸다. 그 백인 남성 조상이 살아남아야 현재의 자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제 속에서 백인 남성은 많은 흑인을 직접적으로 착취하는 인물이다. 루퍼스도 다르지 않다. 그 루퍼스가 다나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정도 되는 흑인 여성 앨리스를 만난다. 20세기 흑인 여성이 19세기 노예제 속의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의 삶을 모두 목격하고 경험한다. 내가 지금 15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상황에 놓일까. 나는 어떤 계층의 사람을 만나 어떤 경험을 할까.

<킨>은 이처럼 차별적 사회 구조 속에 놓인 개인의 한계, 차별이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 등을 빼어난 구도로 보여준다.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과 개인의 복잡한 내면의 갈등을 SF라는 문학 형식 안에 녹여낸 작품이다. 분노하되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고, 오히려 제 분노를 해석하며 세계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자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다. 타자의 고통을 상상하려는 습관이 없고, 그 고통이 결국은 나와도 연결된 문제라는 인식이 없는 ‘지배하는 피해자들’은 이와 같은 세계를 창조하지 못한다. 반대로 약자를 향한 폭력적 감정을 합리화하며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버틀러의 <야생종>에는 “감각이 동물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정도까지 확장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누군가 닭의 목을 비틀거나 돼지를 도살하거나 할 때마다 고통을 당한다.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제 자신도 고통스럽게 한다. 그렇기에 남의 고통을 외면하고 제 억울함 속으로 파고드는 일이 훨씬 쉽다. 하지만 결코 제 세계를 확장하지 못할 것이다.

흑인이, 흑인 여성이 작가가 되는 일, 그것도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던 SF를 쓰는 일은 옥타비아 버틀러에게는 ‘긍정적인 집착’이었다. 대학 작문 시간에 버틀러가 쓴 글들에 대해 교수들은 늘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예 “정상적인 글은 쓸 수 없나요?”라고 했다. 버틀러의 어머니는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비서직을 구해서 버틀러가 그야말로 ‘제대로 된 일’을 하며 살길 원했다. 그러나 버틀러는 시간제 일을 하며 글쓰기를 이어갔다. 훗날 작가로 성공한 뒤 에세이 ‘긍정적인 집착’을 통해 작가가 된 과정을 소개한다.

인간에게 희망이 있고, 이 나라는 희망이 있나, 그냥 다 망해라! 라는 마음이 때로 찾아온다. 그래도 어떤 ‘긍정적인 집착’을 계속 품고 산다. 버틀러의 단편 ‘마사의 책’에서 마사의 눈앞에 나타난 신은 처음에 백인 남성이었다. 신과의 대화 과정에서 이 신의 모습은 흑인 남성으로 변하고 다시 흑인 여성으로 바뀐다. 마사가 신에게 묻길, “왜 당신을 흑인 여성으로 보게 되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린 거죠?”. 신은 답한다. “삶이 너를 준비시킨대로 본단다.”

제 삶이 어디까지 확장되었는지에 따라 신의 모습은 각각 다른 얼굴로 나타날 것이다. 신의 얼굴에서, 그의 목소리에서 누가 보이고 누구의 말이 들리는가. 나라면 어떨까. 내 눈에 신은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한 해가 저문다. 삶이 쌓일수록 소망한다. 내 삶이 점점 더 다양한 얼굴을 한 신과 마주할 준비가 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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