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거장 알모도바르의 자전적 이야기, ‘페인 앤 글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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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얻은 벌이 아니다.” <은교(2012년)>에서 노교수 이적요가 읊조린 대사다. 젊음과 늙음은 누구나 거쳐야 하는 것인데,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을 잣대 삼아 누군가는 자신만만하고 누군가는 움츠린다. <페인 앤 글로리(Pain and Glory)>는 삶의 내리막길에서 지나온 인생의 회고를 통해 다시 희망을 얻는 노년의 고백에 대해 다룬 영화다.

영화의 첫 장면은 서 있는 듯 앉은 듯한 자세로 수영장 물속 깊숙이 가라앉아 명상하는 영화감독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를 비춘다. 살바도르의 등에는 수술 자국이 선명하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그의 몸은 크게 쇠약해졌다. 척추가 휘어 대수술을 받아야 했고, 무릎은 덜컥거린다. 정신적으로도 고갈된 상태다. 다시 영화를 찍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숱한 걸작을 만들어낸 심신은 지쳐버렸다.

삶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지난 살바도르는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 지내던 중 리마스터링된 자신의 영화 시사회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를 통해 32년 만에 자신의 영화를 다시 본 살바도르는 과거와 다른 감상에 빠져 주연배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를 만나러 간다.

알베르토는 영화 촬영 당시 견해 차이로 절연한 사이다. 재회는 서먹하지만, 둘은 이내 사이를 회복해 시사회에 동반 참석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살바도르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헤로인에 빠지고 과거의 자신과 조우한다. 이 과정에서 알베르토는 우연히 살바도르가 사적 경험을 쓴 글을 읽고 매료돼 연극을 준비한다.

영화의 전개는 시간을 넘나드는 교차 편집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어가는 방식이다. 마치 자서전 같지만 연대순이 아닌 파편적인 기억을 기반으로 서사를 진행한다. 교차 편집은 전형적이지만, 과거의 기억을 현재와 엮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쇠잔한 살바도르가 눈을 감으면 생기 가득한 어린 살바도르가 화면에 나타난다. 현재의 살바도르는 화려하고 근사한 아파트에 살지만, 감성은 메말랐다. 인생의 절정을 경험한 지는 오래고, 삶의 내리막길에서 삶의 원동력인 창작도 멈춰 외로운 삶을 이어간다.

어린 살바도르는 동굴을 집으로 삼을 정도로 가난하다. 학비가 없어 원치 않는 신학교에 진학할 정도로 빈곤에 시달린다. 하지만 물질의 풍요를 이룬 현재보다 감성은 충만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저앉지 않았던 어머니 하신타(페넬로페 크루즈) 덕분이다. 이는 나이든 거장이 자신의 뿌리가 어머니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살아온 날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많다고 여겨질 때, 살바도르는 어머니와 첫사랑의 기억 등 과거의 기슭에서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영화는 스페인 출신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성 정체성과 출신 배경 등 주로 개인적인 영역에서 영감을 얻는 페드로 감독은 살바도르를 통해 자신을 비춘다. 영화는 113분 동안 강물처럼 매끄럽게 흘러간다. 화려한 색과 기하학적인 패턴의 미장센은 시선을 끈다. 영화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차분하지만, 중간중간 강렬하고 아찔하고 아련하고 아득한 감정선이 불쑥 튀어나온다. 은밀한 사랑, 고통, 회한, 희열 등 삶과 예술을 지탱해 온 고통과 영광(영화의 주제)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에서 배우들의 호연도 돋보인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페넬로페 크루즈, 에시어 엑센디아, 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아(페데리코 역) 모두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다. 어떤 이는 이 영화의 깊이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공평하게 나이가 들고 생기도 결국 시들게 된다. 삶을 반추할 수 있다면, 누구나 꽃피우는 삶의 한 소절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 나이가 된다면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을 이해할 것이다.

<페인 앤 글로리>는 지난해 세계 유수의 영화시상식에서 <기생충>과 경합해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트로피를 든 봉준호 감독이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이름을 수상소감에서 언급하며 영광을 표현했다. 올해로 71세, 페드로 감독의 다음 영화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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