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수정처럼 빛나는 ‘애비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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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찍지 마! 누가 너희 연기 잘한대? 너희는 연기자가 아냐! 이게 연기에요. 감정이 느껴지시나요? 전 할 수 있어요. 너희는 못 하지만.”

몇 년 전 농구공을 든 배우 게리 올드만이 단지 유명하다는 이유로 영화에 출연하는 농구선수들에게 분노 연기를 보여주는 척 비판하는 영상이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실제 할리우드에선 NBA 농구선수들이 영화에 등장해 연기력 논란을 낳았다. 게리 올드만의 영상은 2016년 <배우학교>의 예고편에서 배우 박신양이 패러디했다. 대상은 아이돌이었다.

아이돌의 연기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다.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아이돌은 영화나 드라마, 뮤지컬에 종종 진출하는데, 형편없는 연기력으로 혹평이 쏟아져 왔다. 연예인의 위상이 높아지고, 드라마가 산업이 되면서 배우는 연기력보다 상품성이 더 중시되는 풍조 탓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인지도가 높은 배우를 섭외해야 해외 판매도 되고 PPL 등 제작비 충당도 잘 돼왔다.

하지만 아이돌 출신이라는 이유로 연기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애비규환>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정수정(크리스탈)이 보여준 연기는 어색하거나 부족하지 않다. 엄마 역의 배우 장혜진과 새아빠 역의 최덕문 등 중견 배우와 호흡도 안정적으로 살린다. 영화에서 진한 화장에 화려한 의상을 입던 크리스탈은 보이지 않는다. 맨 얼굴에 질끈 묶어 올린 머리, 후줄근한 티셔츠에 펑퍼짐한 청바지 차림이다. 덕분에 영화에 집중하는데 전혀 불편한 점은 없다.

<애비규환>은 아이돌 출신 배우 정수정이 처음 출연한 독립영화이자 첫 주연작이다. 이제 막 영화인으로 첫발을 내딛는 최하나 감독이 201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작품을 쓴 시나리오에서 비롯됐다. 영화진흥위원회 장편 제작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서 제작됐다.

대학생 토일(정수정)은 자신이 가르치는 고등학생 호훈(신재휘)과 연애하다가 덜컥 임신을 한다. 임신한 지 5개월 만에 ‘출산 후 5개년 계획’까지 준비해 엄마와 새아빠에게 알리지만 호통만 돌아온다. 답답한 토일은 ‘자기가 누구 닮아 이 모양인지 알아보겠다’며 얼굴도 모르는 친아빠를 찾아 고향인 대구로 내려간다. 15년 만에 찾은 고향에서 옛 친구도 만나고 친아빠(이해영)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친아빠의 모습은 실망스러웠고 토일은 그에게 잔뜩 화를 낸다. 허탈한 마음에 돌아오지만 예비아빠 호훈이 사라졌다. 호훈을 찾으러 나선 토일은 새아빠와 엄마, 호훈의 부모, 예비 아빠가 뒤엉켜 한바탕 소동을 치른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여타 상업영화와 비교해 훨씬 더 낫다. 상업영화라면 임신한 철부지 예비 부부의 결혼 소동을 그렸겠지만, 가정을 꾸릴 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 속에 가족애를 그려 참신하다. 이혼가정과 혼전임신 등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재기발랄하게 풀어내는 전개도 차별적이다.

‘코미디 영화’로 착각할 정도의 유쾌한 분위기도 돋보인다. 욕설이나 비하로 억지웃음을 끌어내지 않고 관객들을 기분 좋게 웃게 만든다. 이혼 가정의 편견을 날려버리고 혼전임신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눈총도 능청스럽게 비꼰다. 이 과정에서 가족의 의미까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감동 요소도 적절하게 들어가 있다. 엔딩크레디트가 오른 뒤 입가의 미소를 띄울 수 있을 만큼 매력이 가득하다.

무조건적 책임과 희생으로 일관하는 부모의 고정관념도 깨트린다. 막중한 책임감의 무게를 조금 덜어낸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현실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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