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김수영-되기] (12) 백지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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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6 13:39 | 최종 업데이트 2016-07-12 14:42

백지에서부터

하얀 종이가 옥색으로 노란 하드롱지가
이 세상에는 없는 빛으로 변할 만큼 밝다
시간이 나비모양으로 이 줄에서 저 줄로
춤을 추고
그 사이로
4월의 햇빛이 떨어졌다
이런 때면 매년 이맘때쯤 듣는
병아리 우는 소리와
그의 원수인 쥐 소리를 혼동한다

어깨를 아프게 하는 것은
노후(老朽)의 미덕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개울과 개울 사이에
하얀 모래를 골라 비둘기가 내려앉듯
시간이 내려앉는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두통의 미덕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바다와 바다 사이에
지금의 3월의 구름이 내려앉듯
진실이 내려앉는다

하얀 종이가 분홍으로 분홍 하늘이
녹색으로 또 다른 색으로 변할 만큼 밝다
―그러나 혼색(混色)은 흑색이라는 걸 경고해 준 것은
소학교 때 선생님……

글에서 인용한 '백지에서부터'는 <김수영 전집 1(시)>에 수록됐습니다.

1961년에 쓴 「시」에서 김수영은 “어서 일을 해요 변화는 끝났소”라고 말한다. 그후,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상이긴 하지만, 그는 “르뽀를 써주기로 약속”하고(산문, 「소록도 사죄기」) 소록도를 가게 된다. 같은 해 1961년 11월에 쓴 「여수(旅愁)」에도 소록도 행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여전히 자신의 내면이 일상으로 가라앉는 것에 대한 어떤 불안감이 읽힌다. 예컨대, 소록도를 갔다 와보니, “시멘트로 만든 뜰에/겨울이 와 있었”으나 “그래도 나는 조금도/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집에 와서도/그동안의 부재에도/놀라서는 안 된다”.(「여수(旅愁)」) 왜냐하면 산문 「소록도 사죄기」에서 밝힌 것처럼 “르뽀를 써주기로 약속한 것”도 이행치 못했는데, “중단했던 번역일이나 끝마치고 천천히 쓰자고 벼르던 판에 또 다른 바쁜 번역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변화는 이미 끝났고 생계를 위한 일(이 말은 그가 「달나라의 장난」에서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말한 것을 염두에 둘 때, 제한적인 혹은 상황적인 의미로만 써야 한다)을 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애써 어떤 둔감함에 익숙해지려 노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자책이 나오는 것이다 : “상식에 취한 놈/상식에 취한/상식/상…… 하면서/나는 무엇인가에/여전히 바쁘기만 하다”.

사실, 「여수(旅愁)」라는 시는 그렇게 뛰어난 시가 아니다. 하지만 거듭 말했듯이 김수영의 시는 한 편 한 편을 어떤 지속으로 읽어야 전모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김수영은 감정의 변화 혹은 동요를 통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인식의 변화 과정 중 어떤 변곡점에서 시를 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식의 변화는, 단절과 지속이라는 대립적인 특징이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백지에서부터」는 「여수(旅愁)」에서 보였던 불안감에 조금 더 냉정하게 천착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자신에게 찾아온 어떤 변화(그것이 생활의 변화이든 아니면 인식의 변화이든 간에) 속에서 사라지고 새로 생성되는 것들 자체를 탐색하고 있다. 일단 “하얀 종이가 옥색으로 노란 하드롱지가/이 세상에 없는 빛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이 나비모양으로 이 줄에서 저 줄로/춤을 추”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사이로/4월의 햇빛이 떨어졌다”는 것이며, “4월의 햇빛이 떨어”진 틈으로 (닭을 치고 있는 계사에서 들려오는) “병아리 우는 소리와/그의 원수인 쥐 소리를 혼동한다”는 점이다.

‘병아리 소리’와 ‘쥐 소리’는, 떨어지는 4월의 햇빛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일상의 소리일 수도 있고, “우는 소리”에 집중해 보면, ‘병아리를 공격하는 쥐’는 변하지 않은 정치 현실(「육법전서와 혁명」 참조)에 대한 유비일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4월의 햇빛이 떨어지는 틈 사이로 어떤 “혼동”이 찾아오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4월”은 물론 김수영이 그토록 집중했던 혁명을 환기한다. (이 시가 3월 18일에 써진 것을 고려하면 여기서 말하는 “4월”이 의미하는 바가 조금 더 명확해진다.)

그리고 “햇빛이 떨어졌다”에서 ‘떨어짐’은 그 맥락과 어감상 하강의 의미가 아니라 추락 혹은 전락의 뜻을 갖는다. 정리해 보면 이렇다. “하얀 종이가 옥색으로 노란 하드롱지가/이 세상에 없는 빛으로” 변하는 사소함도 “시간이 나비모양으로 이 줄에서 저 줄로/춤을” 춰야 하는 변화를 통해서 가능한데, 그 변화는 추락한 혁명의 틈새로 가치의 전도가 일어나는 “혼동”도 함께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2연에서 그러나 “노후(老朽)의 미덕은 시간이 아니다”고 단언할 때, 이것은 마치 부정적인 것 혹은 동일한 것이 다시 오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원회귀가 아니다,는 들뢰즈의 단언을 연상케 한다. 그러니까 “어깨를 아프게 하는 것” “노후(老朽)의 미덕은” 자신이 생각하는 ‘다른 시간’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노후(老朽)의 미덕은”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2연의 마지막 행에 등장하는 ‘내려앉는 시간’은 김수영이 꿈꾸는 시간이 도래하지 않고 있음을, 도리어 어떤 “혼동”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음을 은유한다.

3연은 2연의 반복, 변주이다. 다만 3연에서는 2연의 “어깨”가 “머리”로 “노후(老朽)의 미덕”이 “두통의 미덕”으로 바뀌었고 내려앉는 것은 “시간”에서 “진실”로 바뀌었다. 동일하다고 말해도 무방한 이 구조 속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시간”과 “진실”의 ‘내려앉음’이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2연에서는 “개울과 개울 사이에/하얀 모래를 골라 비둘기가 내려앉듯” 내려앉고, 3연에서는 “바다와 바다 사이에/지금의 3월의 구름이 내려앉듯” 내려앉는 것이다. 이 점이 어쩌면 시가 드러내려는 리얼리티를 혼란스럽게 하는 실수인가도 싶지만, 이미 1연에서 “하얀 종이가 옥색으로 노란 하드롱지가/이 세상에 없는 빛으로 변할 만큼 밝다(강조-인용자)”라고 쓴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이 시에서 김수영은 전락 혹은 타락과 하강의 이미지와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뒤섞어 쓰고 있다. 그것을 다시 강조하려는 듯 4연은 “하얀 종이가 분홍으로 분홍 하늘이/녹색으로 또 다른 색으로 변할 만큼 밝다(강조-인용자)”로 시작된다. 밝음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떨어짐’(전락) ‘잊어버림’(망각) ‘내려앉음’(유실) 등이 번식하고 있다는 김수영의 현실인식은 이미 1연에서 “병아리 우는 소리와/그의 원수인 쥐 소리를 혼동한다”라고 명확히 제시되어 있다. 김수영 자신이 말한 ‘시의 힘’은 바로 1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솔직한 그의 내면은 바로 4연의 마지막 행에 있다. “―그러나 혼색(混色)은 흑색이라는 걸 경고해 준 것은/소학교 때 선생님……”. 되돌아가면 전락, 망각, 유실로 표상될 수 있는 현실이 “개울과 개울 사이” 혹은 “바다와 바다 사이”의 “하얀 모래”나 “3월의 구름”과 뒤섞여 쓰인 것은 단지 “혼색(混色)”인데, 그 “혼색(混色)은 흑색”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2, 3연에서 보여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동시적 등장이 일으킨 환각은 김수영의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환각을 표현한 것이 된다. 물론 그 환각은, 변화는 끝났으니 “어서 일을 해요”라고 자신을 다잡았을 때부터 일어난 것이며, 일상의 일과 “변화”(혁명)가 아직 같은 도정에 있지 않은 1961년 당시 김수영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준다.

마지막 연의 “혼색(混色)은 흑색”이라는 단언은 김수영 특유의 결기와 단절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제목인 ‘백지에서부터’는 새로운 출발에 대한 김수영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해석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말은 1966년에 쓴 「이혼 취소」의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 신의 지대(地帶)에는/중립이 없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단절의 의지는 김수영 자신이 기질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사실 이러한 ‘잔인함’은 오늘을 사는 시인들이 배울 덕목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시에서 더더욱 배울 것은,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 정직성일 것이다. 김수영의 말대로 “시인의 스승은 현실”밖에 없다.

뱀다리;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는 김수영 시를 시종일관 일반성/특수성이 아닌 단독성/보편성으로 해석한다. 물론 그가 김수영의 시를 구체적인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지게 독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강신주는 단독성/보편성의 개념을 들뢰즈 철학에서 빌려오는데, 들뢰즈의 개념은 단독성/보편성이 아니라 특이성/일의성이다. 존재는 하나인데 그 특이성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게 아마도 그것에 대한 거친 설명이 될 것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실체-양태 개념과 얼마간 겹친다.

강신주의 어법을 그대로 가져와 말하면, 시는 단독성을 지향해 보편성에 이르는 게 아니라 세계에 만개한 특이성을 표현하면서 그것을 가능케 한 일의적인 것을 찾아 나서는 도정이다. 내 식으로 말하면 좋은 시는, 세계의 진실을 가능한 한 많이 표현한 작품이다. ‘많은 진실’을 표현함으로써 ‘깊이’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진실’을 표현함으로써 진실과 진실 간에 그만큼 많은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그 많은 상호작용으로 인해 난해시가 되기도 하고 명징하면서 깊이에 육박해 들어가는 시가 되기도 한다.

"작품 전문은 저작권자와 협의하에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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