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운동가들] 대구여성회 20년 활동을 끝낸 91학번 남은주

#젠더, 인권의식을 중요성, 대중성과 전문성
#남은주가 지켜본 시민사회운동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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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때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사회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운동가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애를 씁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며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인과 싸우기 위해 운동가들을 몽땅 폄훼하기도 합니다. 운동권이라는 어원은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에 나선 학생운동가를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용어였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기득권으로 살아가지 않았고, 또 일부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오늘날까지 사회운동을 이어가는 운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들도 있습니다. 2024년, <뉴스민>은 매달 198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운동가들의 삶과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는 운동가의 고민을 듣기로 했습니다. 

이사람 밖에 떠오르지 않은 게 부끄러웠다. 여성운동가를 찾자니, 여성단체 바깥에서 잘 찾아지지 않았다. 80년대, 90년대부터 꾸준하게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에서 현장을 누비고 있는 여성이 많지 않았다. 운동가가 실무자로 일을 시작해 30년 정도 지나면 사무처장이나 대표가 되기도 해야 하는데, 노동조합과 여성단체를 제외하고 나면 찾기가 어렵다. 유리천장은 사회운동에도 있었겠지만, 여성운동가의 활동을 조명하지 못한 기자의 문제이기도 했다.

남은주(51)는 최근 대구여성회 상근 활동을 끝냈다. 2002년 회원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상근활동가로 근무를 시작해 대표까지 지낸 곳에서 활동을 마무리한 것이다. 더 큰 직책도 없고, 새로운 활동가들의 공간을 빼앗고 싶은 마음도 없단다. 의외로 그는 시민사회운동이 ‘정치운동’에 부족하다고 짚었다. 그렇지만 출마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한다. 재미난 일, 안 해본 일을 찾고 있는 그를 지난 2월 20일 자택에서 만났다.

▲2월 20일 자택에서 만난 운동가 남은주.

#1991년 대학생 남은주의 기억

대구 효성여고를 졸업한 남은주는 1991년 대구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부터 구호와 피켓을 봤다. 고교시절 독서토론반이었던 남은주는 대학에서 학생운동하던 친척 오빠가 한 ‘대학가면 기자를 하라’는 말을 기억했다. 학교에서 발간하는 신문사는 꺼려져서, 교지 ‘영광문화’를 제 발로 찾아갔다. 교지편집실에는 수배 중인 선배들이 득실했다. 그곳에서 NL, PD 선배들을 모두 만났다. 그런 선배들이 남은주에게 화두를 던졌다.

“학습하면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어요. ‘너는 계급의식이 없어서 안 된다.’ 계급적인 의식을 갖고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윤금이 씨 사건(1992년 10월 28일 경기도 동두천시 기지촌에서 술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윤금이(당시 26세)가 주한 미군 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Kenneth Lee Markle Ⅲ) 이병에게 살해당한 사건)도 봤고, 권인숙 씨 성고문 사건(1986년 6월 6일과 7일 노동 현장 위장취업 혐의로 연행된 권인숙을 부천경찰서 경찰이 성 고문을 가한 사건)을 보면서 울었어요. 내가 운동을 하면 겪을 수 있을 텐데, 견딜 수 있을까.”

남은주가 입학한 1991년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던 패배적 시기였다.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시위 현장에서 소위 백골단에 폭행당한 후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대학가에선 1987년을 떠올리며 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인 5월 6일에는 안기부의 전국노동자협의회(전노협) 탈퇴 요구를 거부하던 박창수 한진중공업노동조합 위원장이 고문당하던 중 의문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연쇄적인 분신정국과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이어졌다. 남은주가 다니던 대구대에서도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던 손석용(당시 22세)이 8월 18일 밤 대구대 대명동 캠퍼스 야간강좌 옥상에서 분신 후 투신했다.

“87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자기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91학번은 전체적으로 패배적이에요. 1학년이었고,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는 모습을 봤잖아요. 그런데 대구대는 조금 달랐어요. 1993년 총장직선제를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고, 학생 대중과 함께한 경험이 있었거든요.”

4학년이 된 1994년 남은주는 교지 편집국장을 할 생각이었는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자 동기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그러고는 대구대 여학생위원장을 맡았다. 총여학생회에서 여학생위원회로 바뀐 첫해였다. 특별히 여성운동에 경험이 크진 않았다. 육남매 중에 딸만 다섯인 집안의 맏딸로 살아왔던 경험이 컸다.

▲남은주와 그의 배우자 임성종 대구경북추모연대 대표. [사진=남은주 제공]

#젠더, 인권의식을 중요성, 대중성과 전문성
대구여성회 회원에서 활동가, 사무처장, 대표까지

1995년 2월 졸업한 남은주는 1996년 효성여대(지금의 대구가톨릭대로 통합한 것이 1994년) 여성학과 대학원에 들어갔다. 일주일에 4일 대학원에 나갔지만, 새로운청년회(1988~2004)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청년운동이 한창 난립할 때였어요. 저는 늘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많을 때 명부를 보면 100명 정도 있었어요. 거기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아닌 이들도 많았어요. 지금처럼 문화센터 같은 게 없다 보니, 배움과 새로움에 목마른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청년학교, 여성학교처럼 ‘학교’ 행사를 많이 진행했어요.”

1999년 11월 결혼을 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조교 생활을 하던 중 임신을 했다. 그러면서 남은주는 청년운동의 한계를 느꼈다.

▲새로운청년회 시절 남은주 [사진=남은주 제공]

“청년운동하다가 보면 애를 하나 낳고, 둘 낳고, 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더 이상 활동이 안 되는 거예요. 큰 담론으로는 생애주기가 바뀌게 되면 어려워지는 부분이 있었죠.”

새로운청년회나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구여성회는 학생운동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활동을 열심히 하는 걸 봤다. 때마침, 대학원에서 만난 정박은자가 대구여성회 상근활동가였다. 남은주는 2002년 남성 성문화 조사를 같이하면서 2003년 대구여성회 회원이 됐다. 성평등교육강사양성과정 등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2007년 상근 활동을 시작했다.

“행사를 마치고 뒤풀이를 하면 집으로 사람을 많이 불렀어요. 거대 담론만 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 보이는 거예요. 밥 차려주면 밥상도 안 가져다 놓고, 자기 이불도 못 개고. 술을 마시다 보면 허황된 이야기도 하고, 대화가 잘 되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운동을 오래 하면 사람이 괜찮아져야 하는데, 변화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2002년 100인위 사건(‘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는 2000년 7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활동했다. 대학 총학생회, 노동조합, 사회운동 단체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을 조사해 가해 혐의자 17명을 공개했다) 접하면서 지역 사건도 보게 됐어요. 이 부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다 대구여성회 사람들이였어요. 여성학을 공부했던 경험, 대구여성회 활동을 보면서 이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새로운청년회 시절 남은주 [사진=남은주 제공]

학생운동, 통일운동, 청년운동을 다 겪어본 남은주는 젠더인식, 인권의식이 운동가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대중성을 중요하게 꼽았다. 1988년 창립한 대구여성회가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대구여성회는 초창기 동아리처럼 회원 모임을 많이 했어요. 2007년 회원담당활동가로 들어갔는데 위원회 체계로 바뀌었어요. 일상이 바뀌니 활동력도 달라지고, 그래서 회원 전체 설문조사를 했어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들어오기 어려워져서 센터 체계로 바꾸었어요. 때마침 재정적으로 어려워진 시점이기도 했어요. 그때 전문성이 중요하다고 깨달았어요. 국가인권위, 여성가족부 프로젝트를 하려면 전문성이 필요했죠. 아이디어를 각자 써오라고 했고, 새로운 사업들을 시작했죠.”

남은주는 대구여성회 회원에서 상근활동가, 사무처장을 거쳐 대표가 됐다. 다른 사회단체는 상근활동가가 대표로 승진(?)하는 경우는 드물다. 활동가, 사무처장이 상근하지만, 대표나 운영위원장은 명망 있는 비상근자가 맡는 경우가 많다.

▲1988년 창립한 대구여성회의 초창기 회지.

“장단점이 있겠죠. 교수나 명망가가 대표라면 외연 확장 효과는 있죠. 그런데 상호신뢰가 돈독하지 않으면 대표와 상근활동가 간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이 때문에 사무처장에게 광범위한 권한이 위임되죠. 여성단체가 이런 구조를 갖게 된 것은 시설, 상담소 운영 영향도 있어요. 특히, 성폭력 사건이나 상담은 보안이 중요하기 때문이고, 대표에게 쏟아지는 하중이 더 많죠. 그래서 명망을 확장하고, 평판을 확장하는 일이 실무만큼 중요하죠.”

남은주는 대구여성회 대표뿐 아니라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대표,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를 지냈고, 박근혜퇴진대구시민행동이 주최한 탄핵 집회 사회자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뉴스민 창간 이후 기자는 대구지역 사회에서 굵직한 성폭력 사건 현장에 남은주가 빠진 걸 본 적이 없다. 결혼한 여성직원에게 퇴직을 강요했던 금복주 사건(2016년), 대구은행 직장내 성폭력 사건(2017년) 등.

“시민사회운동은 대중성과 전문성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 이론은 고정된 게 아니라 계속 발전하고 활발해지는 단계거든요. 인터넷에 도는 짧은 글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전문성이 중요하다고 봐요. 직장 내 성희롱은 법적으로 행위자가 아니라 기관장, 사업체의 사업주에 대한 문제 제기가 중요한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성평등 판결 읽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2018년 12월 집회에서 사회자를 맡은 남은주

#남은주가 지켜본 시민사회운동의 한계
“젠더와 기후위기 기본값 돼야”
“시민운동, 진보적이고 매력적이라는 메신저 기능 상실”

30년 사회운동을 해온 남은주가 바라본 사회운동은 어떨까. 회원들의 고령화, 경험의 차이 등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남은주는 사회운동이 지속가능하려면 대중성에 ‘젠더’와 ‘기후위기’를 기본값으로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모 단체 20주년 기념 워크샾에 갔는데, 자기들은 대중 사업을 안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회원이 많아서 회원 사업만 한다는 거죠. 시민운동은 대중과 얼마나 함께하는지가 가장 중요하거든요. 이명박 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안 그랬어요. 변화하고 대중과 함께하려고 했는데,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다들 전화기 들고 기다린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었죠. 박원순 사건 때 저를 보는 눈빛이 서늘했거든요. 지역의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는 분이 저에게 권위적이고 파쇼적이라고 일방적인 공격을 했어요. 아직도 그 사과를 못 받았거든요.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안 변할까. 공공기관은 4대 폭력 예방교육을 받아요. 사회의 기본적인 눈높이가 달라졌는데 시민사회는 모르는 거죠.”

그러면서 남은주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의장을 지낸 정치인 A씨 이야기를 꺼냈다. A 씨는 성폭력 사건 가해자로 논란이 됐다. 그럼에도 올해 더불어민주당에 총선 공천에 도전했다. 결국 출마를 포기했지만, 여러 차례 공직선거에 나서려고 했다.

“사람의 태도 문제에요. 영웅시됐던 이런 사람들은 사람을 도구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운동하면 안 돼요. 특정한 부위를 더듬는 사람이 있다면, 술 먹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술을 안 먹으면 되는 거죠. 운동사회가 훌륭하다고 방어하는데, 그런 사람은 운동하면 안 되는 거예요.”

▲2월 20일 자택에서 만난 운동가 남은주.

사회운동단체는 활동가나 회원이나 모두 고령화되고 있다. 젠더,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도 채워야 한다. 그렇다면 시민사회단체에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단체 간 연대에도 경험이 많은 남은주에게 물었다.

“다시 씨앗을 뿌린다는 생각이 필요할 것 같아요. 기존 운동조직이나 사람들이 자기 틀 안에 갇혀 있거든요. 새롭게 일상을 봐야 해요. 다른 의제를 보는 준비가 되고, 의제 중심의 모임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어요. 모든 사람에게 와 닿는 거대 담론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대구여성회도 새로운 걸 하는 모임이 자기들끼리 활동하도록 놔뒀어요. 기존 조직도 그렇게 열어두면 좋겠어요. 또, 운동하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 상태를 돌아볼 기회가 없던 것 같아요. 여성단체는 집단상담, 리더쉽 과정도 했거든요. 꾸준히 진행할 필요가 있어요.”

올해 2월 6일 임기를 마쳤다. 수많은 단체 채팅방도 대부분 나왔다. 다시 대구여성회로 돌아갈 일은 없는 남은주, 정치권 진출 계획은 없는지 물었다. “없다”는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출마를 할 일은 없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정치운동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죠. 정당인에게 선거가 중요하다면 사회운동하는 사람에게는 법 제정, 정책을 모니터링하는 활동이 지역에서 부족한 것 같아요. 그런 역할이 필요한 것 같아요. 지금 시민사회의 위기는 메신저 역할을 잃어버린 거예요. 과거에는 우리가 가진 지식과 활동이 시민들에게 진보적이고 매력적이었는데, 그걸 잃어버렸어요. 요즘은 자료를 읽고 정리하는 게 재미있어요. 대응하는 활동을 많이 하는데, 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부하고 과제를 찾고 싶어요. 그래서 대부분 채팅방을 나왔는데 핵오염수 교육자료 연구 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천용길 기자
droadb@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