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5월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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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중간인 15일이 지나고 있는 지금 시점은 음력으로 4월 8일이다. 가장 눈부신 달 5월의 아름다움은 음력으로 4월의 아름다움이다. 형형색색으로 피는 꽃과 새롭게 움트는 생명의 활동은 이 시기를 계절의 여왕으로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이다. 따뜻한 햇살과 온갖 꽃들의 향연은 사람들을 실외로 불러내고 있다. 가정의 달인지라 풍성한 식탁을 두고 가족들이 함께 둘러앉는 시간도 많아,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 부럽지 않다.

그나마 미세먼지나 황사에 약간의 얼굴 찌푸림은 있겠지만, 현대인에게 5월은 부정적인 면이 거의 없는 아름다운 달이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5월, 그러니까 음력 4월의 풍성한 햇볕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오히려 따뜻한 봄볕에 반비례하는 고통이 사회 전체를 엄습하기도 했다. 굳이 시인 엘리엇을 언급하지 않아도, 조선 사람들에게 음력 4월은 가장 잔인하면서도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

평범한 조선 사람들에게 음력 4월은 ‘보릿고개’와 ‘돌림병’의 계절이다. 이 시기 조선시대 일상인들의 기록인 일기를 열어 보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기근과 전염병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400년 전인 1624년 장흥효의 기록부터 200여 년 전인 1700년대 말에 기록된 노상추의 일기까지, 4월의 기록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은 보릿고개이다.

특히 장흥효가 남긴 1624년의 안동부 기록은 심각했다. 이미 그 전해도 흉년이었기 때문에, 전해 수확한 곡식은 봄이 되기도 전부터 비기 시작했다. 자연히 이러한 상황을 대비하여 겨울 작물인 목화를 재배하는 백성들이 많았다. 그러나 수확기가 다가올수록 가뭄으로 목화가 말라비틀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다려도 오지 않던 비가 목화 수확기에 내리면서, 겨우 거둔 목화는 말리지 못해 썩어 버렸다.

결국 백성들은 산에 들어가 소나무를 베고, 그 껍질을 벗겨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큰 소나무 하나를 베어낸들 외피와 나무 속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흰색의 막만 채취하여 먹을 수 있으니, 산에 있는 소나무가 남아날 리 없었다. 배불리 먹을 용도가 아니라, 입에 풀칠만 하기에도 소나무는 모자랐다. 1795년 삭주부사에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노상추의 눈에 들어온 민둥산은 그렇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터였다.

그런 탓인지, 1786년과 1795년의 상황을 기록한 노상추의 일기는 양반이라 해도 먹고 사는 문제가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1786년의 보릿고개는 곡식의 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았다. 수확한 쌀은 떨어졌고, 벼를 시장에서 구입하려 해도 90kg 정도에 1냥을 지불해야 했다. 단순비교는 불가능하지만, 현재 경제적 가치로 볼 때 쌀 100kg을 사기 위해 거의 백만 원이 넘는 돈을 요구했다는 말이다. 아무리 돈을 가진 양반이라 해도 쉽게 쌀을 구할 수 없었으니, 보릿고개가 되면 양반 역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특히 파직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1795년의 노상추 상황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따뜻한 봄볕은 ‘전염병’을 깨우는 자명종이었다. 기근으로 면역 기능이 떨어진 신체는 어떠한 병균 앞에서도 속수무책이었다. 409년 전인 1615년 음력 4월 3일, 예안고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 사는 김광계는 평소 친하게 지냈던 김영조의 아들이 당홍역에 걸려 괴로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홍역은 그 병이 워낙 독해 당독역이라고도 불렸는데, 지금의 성홍열 종류이다. 1613년에서 1614년 사이에 전국에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고, 1615년에도 날이 풀리면서 다시 병이 일고 있었다.

1756년 대구에 사는 최흥원은 돌림병으로 인해 임시처소로 피해 있었다. 최흥원의 어머니와 사촌 아우가 전염병에 걸려 간호할 사람들만 두고 모두 피신해 있었던 터였다. 전염병에 대한 걱정도 컸지만, 어머니나 가족에 대한 불안도 컸다. 이 와중에 어머니가 간호받고 있던 집주인과 그 가족들도 전염되었고, 얼마 뒤 최흥원은 서숙모가 사망했다는 부고를 날아왔다. 천지간에 돌림병을 피할 곳이 없다는 최흥원의 토로는 답답한 상황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러한 전염병의 결과는 처참했다. 노상추의 기록에 따르면, 1786년 음력 4월의 한양 도성의 상황은 처참하다는 표현만으로는 약했다. 음력 3월부터 홍역과 온역, 괴질 등이 도성 내에 퍼지면서 한 달이 넘도록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당시로서는 가장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도성이었으니, 그 피해는 짐작할만했다. 돌아가신 분을 묻다 보니, 결국 도성 근처 모든 땅은 무덤이 되었다. 그마저도 죽는 이가 늘면서 손바닥만큼이라도 남는 땅이 있으면 우선 장사부터 지냈고, 결국 나중에는 모든 무덤이 누구 무덤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나마 이렇게라도 장사 지낸 경우는 다행이었다. 사람이 사망하는 속도를 매장하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음력 4월이 되면 길이나 집에 시신이 방치되기 시작했다. 연고가 없는 시신은 길에서 뒹굴었고, 가족 전체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여 집 한 채가 아예 시신의 집이 되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한양 전체가 거대한 무덤이 될 판이었다. 결국 조정에서 나섰고, 호조의 보고에 따르면 37만여 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시신이 길에서 뒹굴고 있었다. 봄볕이 만든 뜨거운 재앙으로, 5월의 역설이었다.

현대 한국인에게 5월이 역설의 시기가 아니게 된 지는 꽤 되었다. 먹고 사는 게 일정 정도 해결되었고, 팬더믹과 같은 특별한 상황만 아니면 전염병이 걱정되는 시기도 아니다. 물론 그래봤자 1970년대 이후부터 이어진 상황이지만, 그나마 지금은 5월이 오면 봄을 봄으로 오롯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024년의 5월은 어쩐지 다시 먹고 사는 문제가 걱정되고, 병에 걸려도 치료받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극복된 사회로서의 조선과는 다르겠지만, 2024년의 5월은 조선시대만큼이나 역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