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노론의 복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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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이 있어도 맛 때문에 끊기 어려운 식재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복어이다. 이 때문에 복어는 독으로 인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부터 즐겨 먹었다. 물론 당시에도 독을 잘 다루는 조리사가 필요했고, 현대 사회에서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처리한 복어만 먹도록 제도로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조차 간혹 제거되지 않은 복어 독으로 인해 고생하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으니, 독과 맛 사이의 긴장이 주는 짜릿함을 즐기는 사람 역시 적지는 않은 듯하다.

이 때문에 전통시대에 복어는 간혹 복잡한 사건을 만들기도 했고, 범죄나 혹은 정치에 악용되기도 했다. 복어의 맛 뒤에 숨겨진 교묘한 독은 그만큼 치명적이었고, 그래서 그만큼 사고 위험도 높았다. 1709년 음력 4월 21일 엄경수의 기록은 이러한 복어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복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당파로 갈린 당시의 냉혹은 정치 현실도 함께 소환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엄경수는 음력 4월 21일, 이조참판 이정겸이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정겸은 몇 달 전 조정에서 점심으로 복어를 먹었는데, 식사 후 기가 순환되지 않고 막혀 부축을 받아 겨우 집에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후 그는 병석에 누웠고, 여러 달 몸조리를 한 후 이제 겨우 회복되었다고 했다. 당시 일정 정도 건강은 회복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직을 수행할 상황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이조참판의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복어 독에 중독된 결과였다.

문제는 이게 이정겸에서 그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날 이정겸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던 인물은 바로 영의정 최석정이었다. 최석정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주화를 주장했던 최명길의 손자로, 당시 소론의 영수였다. 그 역시 이정겸과 함께 복어를 먹고 기가 순환되지 않아 쓰러지듯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이정겸은 비교적 빨리 회복했지만, 그는 쉬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독에 좋다는 민간요법까지 동원했는데, 특히 사람의 마른 똥이 독에 좋다고 해서 이를 약으로 지어 먹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그는 여전히 위중한 상태였다.

복어 한 마리가 소론의 영수이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던 영의정을 쓰러뜨렸고, 문관 인사를 총괄하는 이조참판까지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당시 조정의 권력은 소론에게 있었는데, 그 핵심 인물 두 명이 복어 한 마리로 인해 쓰러졌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자, 소론의 반대파였던 노론에서는 이를 지켜보면서 그 복어를 ‘노론의 복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만한 게, 당시 노론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모든 정치적 역량을 동원해서 두 사람을 쓰러뜨리려 했지만, 늘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복어 한 마리가 이 두 사람을 조정에서 일시적이나마 퇴출시켰으니, 복어 한 마리의 효과가 크기는 컸다.

어디 그뿐일까! 영의정 최석정은 비록 치료 목적이라고 해도 복어 때문에 사람 똥까지 먹어야 했다. 이렇게 되자 노론 내에서는 이를 두고 “복어가 영의정에게 사람 똥까지 먹게 만들었으니, 우리(노론)는 복어만도 못하다”면서 비웃었다. 그래서 노론 내에서는 복어를 “복씨”라고 높여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까지 나왔다. 사람이 독에 중독되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지만, 비정한 정치는 이를 희화화하고, 손익까지 따졌다.

흔히 나이와 음식 앞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있다. 세월과 배고픔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인데, 당시 상황을 보면 독 앞에 권력도 의미가 없는 듯하다. 최석정은 당시 세자와 끈끈한 관계를 맺으면서 소론 전성기를 이끌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복어 독 하나에 쓰러졌으니, 노론 입장에서는 그만큼 반갑고 고마운 일도 없었을 터였다. 독 있는 음식을 잘 다루지 못했을 때 얼마나 치명적일지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란 게 사람을 얼마나 비정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실제 조선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정쟁의 비정함을 배웠다. 이 당시도 갑술환국(1694년)을 통해 서로 소론과 노론이 손잡고 남인 계열을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한 지 불과 1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사이 이들은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져, 서로를 ‘복어 독에 죽어도 좋을 사람’들로 규정했다. 15년 전 남인과 싸울 때보다 서로를 더 적대시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고, 이 상황에서 복어는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화해와 타협을 목표로 하는 ‘정치 행위’가 아니라,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없애는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민주주의에 기반한 현대 정치에서도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다. 서로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이로 인해 정치 현장이 폭력으로 물들어도, 심지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도, 반대파는 이를 희화화하고 자신들의 유불리만 따지는 우리네 정치 현실이 그렇다는 말이다. 말이 좋아 민주주의이지, 우리의 정치인들 역시 상대를 정치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전쟁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