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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청춘 성장영화에서 유독 강조되는 계절이라면 단연 여름일 테다. 왜 하필 여름일까? 무더위와 장마로 푹푹 찌는 습도 탓에 조금만 움직여도 땀에 푹 절여지는 계절인데 말이다. 여름에 더운 거야 만국 공통이지만, 특히 동아시아는 ‘고온다습’으로 악명이 높다. 요즘엔 한국도 아열대 기후로 변하는 것 아니냐는 푸념이 실감나지만, 여름철 일본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왜 일본 청춘 영화는 굳이 그런 여름에 꽂히게 된 걸까?
일단 무지하게 덥기 때문이다. 더위 탓에 나돌아다니기 질겁이 나지만, 막상 나가게 되면 자유분방해진다. 이것저것 껴입거나 챙기지 않아도 가벼운 차림과 준비로 변화에 대처할 수 있으니 마음의 장벽을 뛰어넘는 순간부터 평소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도전할 수 있다. 게다가 제도권 교육 학사 일정상 여름방학이 버티고 있다. 쳇바퀴 돌 듯 짜인 계획표 속에서 조금의 의외성이 발휘될 조건은 몽땅 갖춰진 셈이다.
그렇게 자리를 깔아준 덕분에 ‘여름’이란 계절은 후덥지근하고 짜증이 솟구치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시간 재량이 주어진 청춘에겐 뭔가 변화, 일탈의 시기로 기능한다. 무한한 가능성과 사건, 사고의 줄타기 속에서 이 계절엔 무엇이든 벌어질 것만 같은 긴장과 기대가 교차하는 훌륭한 무대인 것이다. 근래 들어 한국 독립영화가 일본의 전/현세대 작업과 근접성을 짙게 드러내면서 그런 특징은 대거 상륙하는 중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남매, 3일간의 서울 나들이 비화
‘경원’은 서울에서 독립해 생활하는 중이다. 한여름 어느 날, 경원은 경북 칠곡에서 올라온 남동생 ‘승원’을 맞이하러 서울역으로 향한다. 엄마가 제주도 여행을 가는 바람에 며칠간 동생을 봐주기로 한 것이다. 입시를 앞둔 시기라 잠시라도 혼자 두기 신경이 쓰였던 엄마의 요청이다.
오랜만에 재회한 남매는 경원이 정리한 코스에 따라 함께 서울 구경을 한다. 경원은 마치 엄마를 대신하듯 살뜰하게 동생을 돌본다. 해방촌의 이탈리아 요리 맛집, 지방에선 접하기 힘든 고급스러운 건축 전시회, 유명한 독립서점 등으로 누나의 서울 투어 가이드는 빈틈없이 빼곡하게 채워진다.
승원은 처음엔 서울 구경이 신기하고 누나가 제대로 한 턱 쏘는 게 그저 즐겁기만 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대접도 너무 빡빡하면 금방 지치는 법. 그는 고향에서 편하게 누리던 자유가 슬슬 그립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경원의 소망에서 비롯된, 고급문화와 떠오르는 명소 소개에 승원은 질리고 만다. 대신에 평소 좋아하던 피규어나 피시방 구경이 더 간절하기만 하다. 하지만 경원은 자신의 구상에 따라 철두철미하게 짜둔 계획을 관철하는데 요지부동이다. 동생을 아끼기 때문에 더 그럴 테다.
고작 3일간의 서울 체류 중 둘째 날이 되자 남매는 티격태격하기 시작한다. 여행 떠난 엄마보다 더 엄마 노릇에 충실한 경원에게 기가 눌린 승원이지만, 입이 비죽 튀어나온 채 마지못해 끌려다니는 건 못 해먹을 노릇이다. 그런 와중에 경원은 우연히 승원이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다. 자기만 빼놓고 한통속인 엄마와 승원에게 배신감을 느낀 그는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남은 일정을 몽땅 폐기하고 드러눕는다.
남매간에는 서릿발 같은 냉전이 개시된다. 남동생은 어떻게든 꽁꽁 얼어붙은 누나의 마음을 돌려보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가족의 정이란 그러다가도 눈 녹듯 서서히 시간이 해결해 주는 맛 아니겠는가. 3일째 되는 마지막 날, 남매는 천천히 산책을 즐기며 오랫동안 떨어져 살며 풀지 못하던 진솔한 대화를 재개한다.
사라진 가장의 책무를 떠맡은 주인공의 딜레마
경원과 승원의 가족사에서 눈에 띄는 건 ‘아빠’의 부재다. 아빠는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았고, 남은 가족은 그 공백과 함께 똘똘 뭉쳐 굳세게 살아왔다. 그들은 늘 아빠를 언급한다. 아빠는 머릿속에선 한 번도 가족 곁을 떠난 적 없는 셈이다. 하지만 개별 구성원의 대응 방식은 제각각이다.
경원은 마음 단단히 먹고 가족의 행복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무장한다. 동생에게 서울 일정 내내 보인 통제와 안내는 유사 가부장의 전형적인 예시다. 내가 이렇게 마음 써가며 배려한 걸 동생은 당연히 수용해야 한다는 ‘가장의 권위’를 망토처럼 두른 경원이다. 반면에 한순간도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남매간에 벌어지는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엄마는 이제 자녀도 성장했으니 미뤄둔 개인의 삶을 회복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다. 승원은 누나의 시선에선 철없는 10대의 전형으로만 비치지만, 그 역시 천하태평은 아니다. 일찌감치 독립한 누나와 고향에서 함께 사는 엄마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완충재 역할을 소화하는 중이다.
하지만 여기서 떠오를 질문 하나. 그렇게 가족에 대한 의무감이 투철한 경원은 왜 함께 고향을 지키지 않고 홀로 서울에 상경한 걸까. 남매는 함께 남산 정상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대도시의 전경을 내려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경원의 회상을 통해 그에겐 경상북도 칠곡이란 동네가 그리 싫지 않지만, 그곳에 머물면 질식될 것 같은 가족 수호의 중압감, 가장의 책무에 깔려 죽을 것 같은 답답함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어린 시절 경원에겐 그 양가성에서 오는 냉탕과 온탕 교차가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운 숙제였을 테다. 그저 눈치 볼 것 없이 숨 쉬고 싶어서 경원은 온전히 개인의 익명성이 담보되는 대도시 서울로 이주한 셈이다. 이곳에선 무얼 하든 내 선에서 감당하고 해결만 하면 되니 말이다. 그런 경원이지만 남겨진 가족에 대한 부채의식은 원죄처럼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삶을 택한 건 후회하지 않는다.
경원의 초반 캐릭터 설정에서 균열이 일어나는 부분, 첫날 밤의 작은 일탈은 그런 그의 잠재된 욕망과 본인을 서울로 탈출하게 한 생존 욕구가 어지럽게 충돌하는 전장의 풍경이다. 남동생에게 거세게 윽박지르던 순간은 그래서 오히려 위악적이고 책임회피에 가깝게 다가온다. 겉으로 할 만큼 했으니 내심으론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배덕의 정서가 경원의 심중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민자의 정서와 향수를 서울 vs 지방 대비로 풀어낼 가능성의 작업
주인공은 해방을 향한 욕망과 고향에 방치한 가족에 대한 죄의식 사이에서 겉으론 드러내지 않지만, 내적으로 격하게 부딪히는 두 세계 사이를 표류하던 중이다. 물끄러미 어딘가를 응시하는 경원의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꽂히지 않을 수 없어진다. 물리적 공간의 변화를 통해 그런 이중성을 해소하려던 그의 기대는 대도시의 익명성 덕분에 잘 풀린 듯했지만, ‘침입자’ 역할에 해당하는 승원의 습격으로 위기에 직면한다. 위기는 동시에 다음 단계로 진입할 필사의 도전 기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름은 변화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간대다. 관객은 여름에만 ‘가능한 변화(들)’을 화면에서 목격할 운명이다.
감독의 자전적 체험은 그렇게 무더위에 지친 이들에게 청량한 기운을 북돋는 한 줄기 바람처럼 영화로 구현되기에 이른다. 지방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일정한 시기가 되면 다들 대도시로 떠나 독립의 희열을 만끽하려는 것처럼 감독 자신의 영화 속 대행자라 할 경원의 성장기가 일본 청춘 영화의 주인공과 자연스레 겹쳐 보이는 작업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겪으며 가장 노릇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자신을 구속해 온 주인공이 마침내 그런 강박을 내려놓고 해방되는 과정이 담담한 터치로 화면 가득 묘사된다. 이제 ‘건널목’이라는 인생의 분기점을 통과한 그에겐 가족의 순기능만 간직될 것이다. 여름이라는 계절을 통째로 압축한 것 같은 질감이 주인공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줬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물들의 대사로만 언급되지만, 지방민이 상상하는 대도시 서울의 근사한 풍경과 수혜지점을 탄탄하게 구축한 덕분에 <여름의 건널목>은 두 개의 교차를 성공적으로 결합하는 데 성공한 사례로 남을 수 있었다. 경원이 남동생과 함께 추억하는 한적하고 목가적인 시골길 등하교의 추억은 그야말로 일본 청춘물의 자장 안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이는 경원이 과거 고향의 기억 중 취사 선택해 남긴 풍광에 가까울 테다. 반면에 경원이 승원에게 애써 보여주고자 하는 서울의 명소들이 어떤 곳인지, 과연 본인도 그곳을 두고두고 애호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런 허위에서 벗어날 때 인간적 성장과 생활무대로서의 공간이 모두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을 테다.
‘서울 쥐와 시골 쥐’ 동화처럼 경원이 대도시의 수혜를 그저 과장한 건 아니다. 경원은 칠곡에서 얻지 못한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보호막을 낯선 서울에서 오히려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고향에 두고 온 부채감은 여전히 그의 한구석에 단단히 둥지를 지은 채 떠나지 않는다. 결국엔 경원의 온전한 대도시의 삶을 위해서라도 승원과 의도하지 않은 3일은 통과의례로 절실했던 셈이다. 그 과정을 거친 덕분에 영화가 끝난 후 경원은 진정한 ‘모던’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다. 따져 보면 얼마나 많은 지역 청년들이 기회를 찾아, 혹은 탈출구로서 서울 혹은 타향으로 떠나고 있는가. 그런 지점을 건드리는 이 영화는 지역 영화의 광의적 확장 사례로 손색이 없다.
<작품정보>
여름의 건널목
The Summer got through us
2024 | 한국 | 드라마 | 25분
감독/각본 김가은
출연 김서휘(경원 역), 지준형(승원 역), 김해원(성일 역), 황재하(건우 역), 안민영(엄마 역)
PD 권영민 | 편집 구윤주 | 촬영 이인규 | 미술 고범석
동시녹음 김시원, 이소윤 | 음악 손희정 | 사운드 홍성준(이너비트사운드)
배급 센트럴파크2024 25회 대구단편영화제
2024 16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
2024 6회 대전철도영화제
2024 5회 다양성평화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