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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관청 참상 조운영이 곤장까지 맞고 거제부에 충군充軍되었다. 충군은 일반 군역이 아니라, 벌을 받아 변방이나 수군에 강제 배속되는 일이다. 무관으로서 앞날이 보장된 선전관이 곤장까지 맞고 일반인들이 가기를 꺼리는 임지에 일반 병사로 강등되었으니, 조운영 개인 뿐 아니라 선전관 내에서도 큰 일이었다. 1798년 음력 4월 9일의 일이다.
조선시대 선전관청은 무과 합격자를 비롯한 무관의 길을 걷기 원하는 이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핵심 관청이다. 국왕을 시위하고 궁궐 수비를 담당했으며, 국방에 관한 왕명 출납 뿐 아니라 군령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병조 내 핵심 부서 가운데 핵심 부서였다.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신다는 자부심은 일반 무관들과 달랐고, 누구나 원한다고 선전관이 될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선전관청은 고위직 무관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청이 되었다.
이러한 자리의 특성 때문이었을까? 선전관은 병조판서나 왕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독특한 자기들만의 내적 인사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에서 선전관이 되려면, 먼저 선천宣薦에 들어야 했다. 선전관 천거를 줄인 말로, 미리 선전관이 될 사람을 천거해 두는 제도다. 당연히 선전관이 되려면 우선 선천에 들어야 했는데, 이는 선전관청에 근무하는 현직 선전관들이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후임 선전관이 될 대상을 현임 선전관이 미리 못박아 두는 제도였다. 실력도 물론이거니와, 당색과 지역, 가문, 그리고 주위 평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이러한 내부 시스템은 선전관이 된 이후에도 이어졌다. 신입 선전관을 정무에 참여시킬지 말지를 결정하는데, 이는 주로 선전관청에서 신임 선전관에 대한 허참례를 실시할 때 이루어졌다. 임무 수행 가능 여부를 보고 함께 근무를 설 사람들이 판단하겠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지만, 여기에서 불순不純, 즉 업무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받으면 이후 벼슬길이 막혔다. 선전관으로 발탁되었다고 해도 여기에서 불순을 받으면 그의 벼슬살이 역시 끝이었다. 이 판단 역시 선배 관원들이 서명을 통해 결정했다. 이러한 서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해당 인원에 대해 부정한 사실이 있으면 반대 의견을 표명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두 사람에 의해 특정인의 벼슬길이 막힐 수도 있었다.
막 선전관에 오른 류성태柳聖台가 그랬다. 그는 허참례에 참여하기 전에 여러 관원들로부터 순가純可, 즉 업무 수행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참상 조운영이 류성태를 통과시킬 수 없다면서 반대 의견을 제시했고, 재논의를 청했다. 그런데 이유가 조금 황당했다. 류성태의 7촌이 젊은 시절 우암 송시열의 화상을 보고 침을 뱉은 일로 신문을 받고 유배를 간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운영 자신의 판단에 이 일은 소론인 류성태가 직접 저지른 일이라면서, 이 문제를 소론과 노론의 문제로 끌고 갔다.
선현에 대한 존모를 문제 삼는 동시에, 그 과정에 거짓말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제시했다. 가家를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했던 조선시대 문화에서, 같은 문중 내 7촌이 송시열을 능멸했다는 사실 자체는 문중 구성원 전체 잘못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화에서도 이것이 직접 그를 선전관의 임무 수행이 불가능한 이유로 들 수는 없었다. 조운영이 더 무리해서, 류성태 역시 같은 행동을 했고 거짓으로 이를 숨겨왔을 것이라고 주장한 이유였다.
조운영은 송시열 화상에 침을 뱉은 사건을 언급할 때, 마침 류성태와 같은 소론 이석구가 선전관청에 들어섰다. 그러자 조운영은 “초록은 동색”이라면서 노론계 선배들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이 문제가 당파에 관한 일임을 분명히 했다. 이렇게 되자 소론계 선배들은 류성태를 비호하고 나설 정도가 되었지만, 조운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류성태에게 최종적으로 ‘불순’을 주었다. 순가를 주던 불순을 주던, 이는 조운영 개인의 판단이겠지만, 그것이 선전관에 대한 능력 평가라는 기본 직무 범위를 넘어 버렸다.
조선의 관료 조직 내에서 종종 이러한 일이 있었지만, 이처럼 대놓고 당파 문제로 선전관의 재임 여부를 평가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정조가 격노한 이유였다. 평소 능력 중심의 인사를 강조한 정조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자신의 뜻을 완전히 거스르는 일이었다. 류성태가 인사제도를 이용해 당파의 입장을 개입시키고, 이를 통해 일부러 한 사람의 앞길을 막았다고 판단했다. 조운영에게 곤장을 치고 거제도에 충군시킨 이유다.
조운영은 정조의 처사가 억울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또한 이러한 사안이 터졌을 때,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노론계만이라도 자신을 보호해 주길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 내에서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본래 목적에 따라야 했고, 류성태에 대한 반대도 그 제도 속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제도의 본래 목적과 반대의 논리를 가지고 형식적인 반대를 통해 관직을 가로 막았으니, 이것이 용서되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터였다. 제도가 지향하는 본래의 목적에 맞게 이루어지는 권력 행사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역풍을 맞게 되는 이유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