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나이가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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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 합격을 위해 미친 듯 활시위를 당겼던 젊은 노상추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다. 1746년 영조 재위기에 태어난 노상추는 1825년 80세 수연壽宴을 열었다. 조선시대 장수의 상징인 60살 환갑을 넘어, 70살도 뒤로 한 채, 80세의 생일을 맞았으니, 현대인 관점에서도 장수한 삶이었다. 조선에서 80세는 개인의 장수를 넘어, 국가의 장수를 의미했다.

선산부사도 수연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연락을 했다가 급작스러운 설사 증세로 참석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많은 친척들과 평소 그를 알고 지낸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선산부사 역시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을 담아 포 2첩과 참기름 2되를 선물로 보내왔다. 연회 분위기를 돋울 악공들까지 보내, 하루 종일 이어지는 전치 음악을 전담하도록 도왔다.

노상추 수연의 백미는 조상들에게 종2품에 올랐음을 고하는 고유제였다. 이른 아침 친인척들 중심으로 사당에 모여, 그의 관직이 2품직에 올랐음을 고했다. 강신과 분향을 한 이후, 조정에서 내려온 증직 교지敎旨를 베껴 그 내용을 돌아가신 조상들 신위 앞에서 읽었다. 그리고 축문과 함께 복사한 교지를 태워 조상들이 이를 알 수 있도록 선교宣敎(교지 내용을 널리 알림) 의례를 거행했다. 나이 80이면 모두에게 주어지는 노인직이지만, 이는 노상추 개인의 영광을 넘어 가문의 영광이었다.

떠들썩한 잔치가 진행되면서, 그의 장수를 축하는 술잔이 돌았다. 방명록에 기재된 사람만 80여 명이 넘었고, 상차림은 200여 개가 넘었다. 점잖기 이를 데 없는 양반들이었지만, 선산부사가 보내 준 악공의 음악에 맞추어 노상추의 장수를 축하는 춤을 추는 이들도 있었다. 평소 늘 행동을 조심했던 노상추 역시 당위에서 오랜만에 그들의 춤사위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아마 그의 일생에 이렇게 맘 놓고 즐거워해 본 적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다.

노상추는 삭주부사와 우림위장 등을 지내면서, 그의 최종 직위는 정3품에 이르렀다. 정3품이면 선산부사보다 조금 높았지만, 문관에 비해 무관을 낮게 보는 당시 문화가 늘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80살이 되자 나라가 그의 장수를 축하하여, 기존 직위에 한 등급을 더해 주었다. 비록 실직實職이 아닌 명예직이라고 해도, 그는 이제 2품의 고위직에 오른 관료가 되었다.

조선은 그야말로 ‘나이가 벼슬’인 사회였다. 농업 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 특성상, 오랜 경험과 삶의 지혜가 중요한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경험과 삶의 지혜는 굳이 농업 경제 중심 국가가 아니라 해도 여전히 유효한 자산일 수 있지만, 하늘의 변화와 자연의 이치를 오랜 경험으로 이해해야 하는 농업 경제 기반의 사회에서 노인들의 지혜는 농업의 성패를 결정할 정도였다.

게다가 유교 국가의 원칙을 만들었던 맹자의 말도 영향이 컸다. 특히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고 알려진 맹자가 말한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부모의 생존과 형제의 무고이다. 가족의 평안함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을 지탱시키는 중요한 힘은 부모의 장수였다. 유교의 원리,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조선의 국가 운영 원리는 가家 공동체의 운영 원리를 국가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각 가정의 부모였던 노인들의 무병장수는 그래서 국가의 복이자 즐거움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노인들을 공경하는 핵심 정책으로 기로소를 운영했다. 노인들을 높이고, 그들의 지혜를 빌리기 위해서다. 원래 기로소는 70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지만, 숙종은 그의 나이 59세에 기로소에 들면서 국가가 인정하는 노인으로서 역할을 하고 싶어 했다. 노인 되기를 꺼리는 현대와 달리, 노인에 대한 국가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노인 대우 정책이 바로 노인직老人職이다. 나이 80이 되도록 무탈하게 평생을 살았다면, 그 이유만으로 국가는 그들에게 관직을 내렸다. 이는 신분에 상관없이 이루어졌으며, 이 때문에 비록 천인이나 양민이라 해도 나이 80이 되면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관직에 올랐던 사람의 경우에는 마지막 관직에 한 단계를 더해 줌으로써, 국가를 위해 일했던 그들의 공적을 기렸다. 노상추의 종2품직은 이렇게 해서 내려졌다.

현대 사회의 빠른 변화와 농업 경제의 해체는 오랜 삶의 경험과 그것이 만든 지혜를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시켰다. 경험에서 오는 삶의 지혜가 빠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나이듦은 우리 사회에서 소용과 가치를 잃어 가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공동체의 멘토로서, 그리고 젊은이들이 본받아야 할 삶의 표상으로서 노인이 존재하기 어려워진 이유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까지는 아니어도, 백발의 아름다운 지혜가 빠른 변화와 만나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게 불가능한 일이기만 할까?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