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가운데서 피어난 ‘희생’이란 꽃 – 영화 ‘판도라’ 관람기

[기고] 이명재 김천 덕천교회 목사

16:31

판도라(Pandora)라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단어 아닌가. 제우스가 인간 세계에 내려보낸 최초의 여자, 열지 말았어야 할 상자를 열어 인간에게 재앙을 안겨 준 판도라 상자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말 아닌가.

영화에 대한 정보를 갖고 상영관을 찾은 건 아니다. 기회가 맞아 떨어졌다. 이 정도만 알고 갔다. 지진과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원자력 방사능 재앙은 인간의 힘으로 막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정도.

편리함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에 국한되어야 한다. 특히 편리함이 극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면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원자력발전소가 그렇다.

경제적 효용성 측면에서 본다면 원자력발전소만큼 매력적인 것도 없다. 전기를 싼 값으로 쓸 수 있으니까. 정책 당국자의 눈이 거기로 쏠리기 쉽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만에 하나 원전 사고가 발생한다면 막아낼 힘이 없다. 대량 살상의 참혹한 결과는 인간이 감내하기가 어렵다.

과거 원전 사고의 처절함을 눈으로 보아야 했다. 소련의 체르노빌(1986년)과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2011년)가 그것이다. 좀 불편하더라도 안전한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원전 사고 지역의 후유증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한반도도 더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 지난 9월 12일 경주에는 규모 5.8 지진이 일어났다. 강진이었다. 국민 전체가 깜짝 놀랐다.

경주 권역에는 고리와 월성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곳이 아닌가. 이 발전소들이 지진의 공격을 받아 방사능이 누출된다면 피해 상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원전 사고에 대한 경각심이 고조되고 있다.

▲영화 <판도라>(감독 박정우) 포스터 [사진=영화 판도라 스틸이미지]

영화 <판도라>(감독 박정우)는 이럴 때 개봉됐다. 제작 기간 4년, 총 제작비 150억 원이라고 했다. 지난 9월 경주 지진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만든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규모 5.8 경주 지진은 원전 사고에 대한 경각심, 나아가 <판도라>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판도라>를 재난 블록버스터라고 한다. ‘블록버스터(blockbuster)’의 원래 뜻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쓰인 폭탄의 이름에 기인한다. ‘한 구역(block)을 통째로 날려버릴 위력(bust)’이란 뜻쯤이 될 것이다.

영화에서는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흥행에 크게 성공한 대작 영화’를 일컫는다. 외국 영화로는 타이타닉, 스타워즈, 조스 등이 있고, 국내 영화로는 설국열차, 명량 등이 있다. 이런 영화의 흥행에 다른 영화는 폭탄을 맞은 것처럼 관객이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블록버스터의 독주 때문이다.

등장인물도 낯익은 사람들이었다. 김남길(재혁 역), 김영애(석여사 역), 정진영(평섭 역), 문정희(정혜 역), 김주현(연주 역), 이경영(총리 역) 등과 대통령 역을 맡은 김명민이 특별 출연했다.

영화사에서 만든 홍보지에 ‘숫자로 보는 판도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영화의 스케일을 가늠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 눈이 갔다. 관람 전, 한 번 세심하게 보시라.

“캐스팅 & 촬영 기간 8개월, 후반 작업 1년! 800장의 컨셉아트, 총 세트 면적 16,529m2의 압도적 세트! 전체 2,419컷 중 Computer Graphics(CG) 작업 분량만 1,322컷! 한국 영화 사상 초유의 CG 작업! 참여 배우 6,280명, 참여 스탭 504명의 역대급 스케일! 총 이동거리 6,100km의 전국을 누빈 로케이션!”

영화사가 요약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에 이어 원자력 폭발 사고까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초유의 재난이다. 이 재난 앞에 한반도는 일대 혼란에 휩싸인다. 믿고 있던 정부의 컨트롤 타워마저 사정없이 흔들린다. 방사능 유출의 공포는 점차 극에 달하게 된다. 최악의 사태를 유발할 2차 폭발의 위험을 막는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발전소 직원인 ‘재혁(김남길 분)’과 그의 동료들은 목숨 건 사투를 시작한다.”

▲수조 공간 확보를 위해 살신성인의 역할을 한 주연 강재혁(김남길 분) [사진=영화 판도라 스틸이미지]

영화는 의미를 찾아가는 예술이다. 난 영화 <판도라>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했다.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뭔가? 돈, 지위, 명예? 풍성함에서 오는 편리함?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런 유(類)가 행복이라면 원자력 발전소를 많이 건설하면 할수록 좋다.

그런 유의 행복 뒤에 인간 멸절(滅絶)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당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를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할 과학이 인류 종말을 앞당기는 데 쓰인다면 그 의미를 결코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지금 우리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드 배치 반대 투쟁도 그렇다. 사드가 우리의 행복 추구권과 배치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사드에 내장된 레이더에서 나오는 전자파는 사람들을 서서히 피폐화시킬 것이다. 전자파 피해보다 더 무서운 것이 한반도가 중국과 러시아의 핵미사일 공격 첫 번째 타격 지점이 된다는 것이다.

구한말 우리나라가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터가 되었던 것처럼 미일중러 핵전쟁 무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한반도가 주변 강대국의 전쟁 도가니가 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우리나라엔 백해무익(百害無益)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판도라>의 의미는 이런 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극한 상황 속에서 싹튼 따뜻한 사랑과 희생정신! 이것이 바로 영화의 핵심 주제가 아닐까. 원자력발전소의 1차 누수 때 반강제로 수리반에 투입되었던 평섭, 재혁, 길섭 등. 수조 공간 확대를 위해 위층을 폭발해야 할 상황에서 기술을 가진 재혁이 2차로 투입될 때의 장면….

그것은 대재앙을 죽음으로 막는 행위이다. 폭발 기술을 가진 재혁이 투입되는 장면에서 인당수에 빠지는 심청을 연상한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아니, 동료를 구하고 대재앙을 막은 진정한 영웅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판도라>가 다큐성 고발 영화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이런 데 있다. 직장 동료 사이에 흐르는 끈끈한 인정과 의리,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애. 그런 소박한 삶이 진정한 행복임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주고 있다. 감동 자체였다.

▲소박한 환경 속에서도 사랑이 넘쳤던 재혁의 가족 [사진=영화 판도라 스틸이미지]

인상적인 것 한 가지 더. 지진, 원전 사고 등 국가 재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컨트롤타워 부작동(不作動) 문제이다. 영화 <판도라>에서 그랬다. 위기 국면에서 국가가 해 주는 게 없었다. 사실을 왜곡 축소해서 국민을 속이는 것밖에….

모든 걸 개인에게 맡긴 채 국정 책임자의 우왕좌왕하는 장면을 보면서 2014년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 우리의 대통령에겐 저런 우왕좌왕도 없지 않지 않았나! 대통령의 7시간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지 않나! 통탄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재난은 예방이 최고다. 아니,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재난의 뿌리를 근절하는 것이다. 편리함만을 위해 재난을 이고 사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경제적 효용성만 생각하고 원자력발전소 수를 늘려나가는 것은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에 득이 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나라엔 원전 29기(23기에 6기는 건설 중)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영화 <판도라>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게 아닐까. 눈물이 말라 버린 시대, 난 이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쳐야 했다. 내게 남아 있는 휴머니즘이 고마웠다. 재난 앞에서 내가 취할 자세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생명은 나의 것이지만 다수를 위해 희생해야 할 땐 피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

영화의 교육적 효과라고 할까, 아니면 계몽성이라고 할까. <판도라>는 막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은 경고를 잊지 않는다. 국민 전체, 특히 정책 담당자들이 새겨들을 말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원전 밀집도 1위 국가다. 2016년 현재 4개의 원자력발전소에서 총 24기의 원자로가 가동 중이며 전체 원전 단지 반경 30㎞ 이내에 9개의 광역자치단체와 28개의 기초자치단체가 밀접해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많은 나라가 탈핵을 결정했지만, 한국은 현재 6기를 추가 건설 중이고 4기의 건설 계획을 진행 중이다.”

행복은 경제적 풍요함이나 삶의 편리함에 있는 게 아니다. 그 뒤에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행복일 수 없다. 외적 위협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을 때 진정한 행복을 꿈꿀 수 있다. 영화 <판도라>가 전하려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