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엄니열전] (8) “미군 들어오면 폐기름으로 오염, 사람은 못살아” /초희

소성리 할매부대 청일점, 신동옥(8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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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은 소성리 ‘엄니(어머니의 사투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사드 배치 철회 투쟁 최전선에서 선 소성리 엄니들의 생애를 더듬으며 이 시대 평화를 생각해 봅니다. <다정> 회원들이 쓴 글을 부정기적으로 <뉴스민>에 연재합니다.]

소성리 할매부대 청일점, 신동옥(83세)

초희 (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 회원)

엄니들 이야기만 써야 할까? 할배 이야기는 쓰면 안 될까? 할매들이 전장에 나설 때면 가장 가운데서 자리 잡은 청일점 어른 한 분이 계신다. 노인회장님이라 불리는 신동옥(83세) 씨는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신동옥, 김학림(80세) 두 노부부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소야의 하늘은 높다. 하얀 구름은 뭉게뭉게 무늬를 만들며 하늘을 꾸며놓았다. 한낮 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세 남자는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 나무 그늘에서 두런두런 수다를 떨고 있다. 빼놓을 수 없는 막걸리 두 병이 서 있다. “맴맴” 매미 소리에 귀가 따갑다. 노부부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춧대를 뽑고 있다. 밭에 조금 심어놓은 고추가 ‘탄저병’(농작물의 과실, 줄기, 잎에 누런 갈색의 병 무늬가 생기고 붉은색 분생자 덩어리가 생기는 병)이 들어 쓸모없게 되어버린 거다. 경주댁 엄니는 아까운 마음에 연신 혀를 찬다. 남편이 뽑은 고춧대를 부여잡고 쓸 수 있는 고추를 고르느라 손길이 분주하다.

▲신동옥, 김학림 부부

정년퇴직하고 고향에서 제3의 인생을 누리고 싶어라
경주댁 엄니 이름은 김학림, 아버님은 신동옥이다. 남자 어른은 부인 택호를 따라서 사용하니, 신동옥 씨를 경주댁 어른이라고 부르면 된다. 그러나 소성리에서 그는 택호 대신 ‘노인회장님’이라고 불린다.

노인회장님은 왜관 미군기지 캠프캐럴에서 삼십 년 넘게 군무원으로 일했다. 1999년 12월 말 정년퇴직을 앞두고 고향 소성리로 돌아와 노후를 준비했다. 정년퇴직한 다음날부터 아침에 일찍 일어날 이유도 없고, 시간에 쫓길 이유도 없었다. 일가친척이 모여 사는 소성리에는 동생들과 친구들이 많았다. 밤마다 동네 사람들과 모여앉아 술을 마셨다. 여유로운 인생을 만끽하는 것은 꿈만 같았다.

원불교 김원명 교무를 알게 된 것은 2000년이었다. 노인회장님도 고집 세기로 따지면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편이라는데, 이상하게 원불교 김원명 교무 말이라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술술 따랐다. 어느 날 김원명 교무가 불쑥 주소와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다. “그거 뭐 할 겁니까?” 하고 물으니 그냥 적어달라고만 하는 거다. 입교증이었다. 그다음은 교당에 한번 가자고 한다. 노인회장님은 “그래 한번 가보자”며 따라나서면서 원불교에 입교했다.

2012년, 초전교당을 창립했다. 노인회장님은 법명을 “상현(常現)”으로 지었다. 초전교당 교도회장이 되었다. 노인회장님은 원불교 2대 교주 정산종사 생가가 있는 소성리에서 원불교 교도로서 사드 반대 투쟁을 하고 있다. 노인회장님은 6남 2녀의 다섯째로 소성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스물이 넘어 도시로 나가게 된 것은 고모 덕분이었다.

“우리 고모부가 김천세무서에서 일하다가 왜관세무서로 옮겨간 거예요. 우리 고모부가 엄청 잘 난 사람이었거든, 고모부가 기차 타고 김천서 왜관으로 출퇴근을 하다 보니까 야근하고, 당직 선다고 집에 못 들어갈 일이 생겨. 우리 고모는 고모부가 의심돼서 나를 옆에 붙여준 거지. 그때 왜관세무서 촉탁직으로 일했어요. 2, 3년 일 할 수 있도록 손을 써준 거야. 고모는 나한테 고모부 감시하라는 작전을 쓴 거지(웃음). 그때 5.16쿠데타가 일어나서 성주 상인들이 왜관 세무서로 쳐들어오고 어수선했어. 현직들은 다 쫓겨나가고, 육군 대위가 꿰차고 들어와서는 세무서장을 하는 거야. 그때 직원 중에 군 미필자들 솎아내기를 하더라고. 내가 입대해 놓고, 논산훈련소에서 한 달 만에 도망쳐 나왔거든. 다시 군대에 갈 수도 없고, 군대는 가기도 싫더라고.”

왜관세무서를 다니는 것이 꽤 괜찮은 간판이었다. 경주댁 엄니의 숙모가 “왜관세무서 총각 괜찮더라”며 연결해주었다. 그 당시만 해도 마땅한 찻집도 없었다. 교통도 불편한 시절이라 남자가 여자 쪽 집으로 찾아가 맞선을 봤다.

“우리 영감이 친정집을 찾아왔지. 우리 집에 구석진 속 방이 내 방이라, 거기 들어와서 선을 한번 보고는 어른들끼리 결정을 해버린 거야.”

맘에 들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신랑 키가 작아서 좀 그렇겠다 싶었는데 말 한마디 못 하고는 시키는 대로 결혼했어.” 시댁의 맏형님(소성리 유선늠 할매)은 “김치 한 단지, 나무 한 구르마, 그리고 쌀 한 가마니”를 손수레에 실어 왜관 신혼방에 살림 밑천으로 챙겨주었다.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던 마을회관의 할매들은 “살림밑천 그마이 챙겨주는 데가 어디 있노? 그때 그래 했으면 많이 해줬네” 하면서 부러움의 탄성을 지른다.

▲신동옥 소성리 노인회장. [사진=장진영]
왜관 미군부대는 내 인생의 가장 고마운 곳, 그러나 사드는 달라
왜관세무서에서 나온 다음은 막막했다. 당시 왜관에 미군부대가 들어설 시점이었다. 세무서에 근무하면서 미군부대에 필요한 58만 평의 행정대장을 노인회장님 손으로 다 발급했던 터였다. 일부 군인들이 들어오고, 대구에서 한국인 정직원이 넘어왔다. 용역업체를 통해 매일 필요한 인력을 공급받아 미군부대의 온갖 잡다한 일을 하게 했다. 마침 처고모부가 왜관 미군부대 정비부서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사람이 필요했고, 미군도 이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을 때였다.

“그때는 도시락 싸 들고 출근하면, 작업반장이 어느 부서에 몇 사람, 어느 부서에 몇 사람, 나눠서 일을 보내요. 하루 일을 하고 나오는 거지, 일거리가 없으면 집으로 돌려보내는 경우도 많았어요. 나는 용케도, 허탕 치고 집으로 돌아간 적은 없었어.”

당시 시간당 임금은 11원이었다. 8시간 일하면 88원. 밥만 억지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궁핍한 수준이었다. 일거리가 없는 용역노동자가 굶어 죽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군사쿠데타로 경기는 불안했고, 식량은 부족했다.

“나는 참 행운아였어.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행운이 따라다니는 거 같았어. 매일매일 열 사람, 스무 사람 데리고 나가서 근무일지 다 제출해야 하는데, 반장이 하나 필요하다는 거야. 왜관에서 사귄 친구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동갑이고, 또 하나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지. 둘이 사촌지간이었어. 그 당시 회사 이름이 대한통운이었거든. 현장소장이 이 친구들 외사촌이더라고. 내가 왜관세무서 다녔다는 걸 알고 있던 이 친구들이 고모한테 나를 소개해주고, 나를 써달라고 부탁한 거야. 고모는 현장소장인 남편한테 또 이야기를했다는 거지. 다른 이들 88원 일당 받을 때 반장은 104원 받거든. 일을 더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감독만 하는 거라 좀 수월한 편이었어.”

노인회장님은 ‘캠프캐럴’ 용역업체 반장이 됐다. 물건이 부식되거나 부패하지 않도록 잘 보관하는 업무를 보는 CNP 보전 및 유지 부서였다. 일을 꾸준히 할 수 있게 되었고, 안정적이었다. 미군부대가 정직원을 모집하는 기회가 생겼다. 기회를 놓칠세라 이력서를 냈다. 그 자리에 들어가려고 뒷돈을 써대는 사람들이 많았을 때였다. 그런데 해당부서 미국인 행정책임자가 노인회장님을 잘 봐주셨다. 미군부대 정직원이 됐다. 가깝게 지냈던 미군 준위와 중사가 노인회장님을 보고 ‘엄지 척’ 해줬던 것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한다.

가장 밑바닥 등급에서 12급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올라갔다. 용역업체 때와는 처우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용직이 월급이 2,000~2,400원 수준이었다면, 미군부대 정직원 월급은 6,000원이었다. 그러나 미군부대에서 일하면서 겪었던 서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을까? 독일 출신 미군 직장상사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심부름이란 심부름을 다 시켰다. 하는 일마다 간섭을 해댔다. 속으로 “이 자슥이 돌았나?” 싶을 정도로 괴롭히는 상사였지만, 꾹꾹 눌러 참으면서 그의 지시를 따랐다. 그러던 그가 떠나기 전에 노인회장님께 큰 선물을 하나 남겨주었다. 정년(만 60세)퇴직 연장신청을 해 준거다. 그것도 4년이나.

“퇴직연장 할 수 있다고 해도 미군부대가 잘 안 해주고, 보통 밑에서 신청해서 위로 올라가는데, 상부에서 내려오니까, 그런 일은 잘 없잖아요. 놀라울 따름이었죠. 내가 정말 행운아구나 하면서 그때 정말 감탄했어요.”

미군부대 군무원이라도 퇴직금이나, 연금은 보장되지 않았다. 퇴직금을 매년 분할지급 받았기 때문이다. 퇴직연장은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노인회장님은 말씀하신다.

“미군부대에서 주로 했던 일은 포장일이야. 물건이 노출되면 저장하기 어려운 거, 그냥 두면 괜찮은 게 있고, 그냥 둬서 부식되는 것이 있는데, 닦아서 기름칠하고 포장해야 하는 거야. 닦고, 관리하고, 포도 있고, 총 같은 무기도 있어서 사실 위험하긴 위험한 일이었지.”

미군부대는 노인회장님 인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일터였다.
지난 정부 적폐를 떠안고 가는 문재인 정권 사드배치는 적폐의 시작

“미군부대는 나한테 아주 고마운 곳이요. 내 평생 가족들 먹고살게 해 준 곳이지, 자식들 공부시켜준 곳이고, 개인적으로 고마운 곳이야. 그런데 지금 사드배치 하는 정부의 행태는 몹시 나쁜 짓이라고 봐.” 사드 이야기가 나오자, 노인회장님의 얼굴은 노여움이 가득했다.

자녀(2남 1녀)들은 다 자랐다. 사위와 며느리까지 식구를 늘렸다. 세상에 빛을 본 손자와 손녀들에게 할아버지의 시골집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시골집에 손자들이 놀러와 뛰어노는 것을 보는 게 사는 낙이었다.

“미군부대 퇴직하고 고향 돌아오니까 골프장 들어온다고 해서, 그때도 많이 싸웠어. 이창욱 군수랑 나랑 많이 싸웠지. 근데 사드 들어온다고 할 때 진짜 자존심 상하더라고. 이거 진짜 자존심이 상해. 지금 문재인 정부도 적폐라. 박근혜 적폐라면서, 이것도 적폐 시작이라. 환경영향평가 한다면서 절차 밟아서 한다더니, 또 말 바꿔서 사드 4기 추가 배치하겠다고 하고. 이랬다저랬다, 여기 사는 사람들 개돼지 취급하는 거지.”

[사진=장진영]
고향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새 십수 년이 흘렀다. 노인회장님은 텃밭 조금 가꾸는 것 말고는 노인회 친구들과 게이트볼 치면서 여가생활을 보내고 있다. 어릴 적 친구는 거의 없고, 게이트볼 치면서 사귄 초전면 사람들이다. 성주군에서 제3부지를 거론하면서 소성리 롯데골프장으로 사드 배치가 확정되자, 초전 게이트볼 동호회 친구들과 많이도 싸웠다. 성주군 노인회장(이재복)이 ‘사드배치 찬성’한다고 회람을 돌리고, 노인들을 모아서 성주군청에 발대식을 한다고 모여들었을 때, 평소에 잘 나오지 않던 이들이 다 나왔다. 사드를 찬성한다고 거수기 노릇 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 “에라이, 다 치워라” 하며 친구들과 많이 싸웠다.

“속에 천불이 나서 못 참겠더라고. 소성리에 사는 나랑, 초전면에 사는 사람조차도 이렇게 피부 온도감이 다르더라고. 나는 마을 사람들과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어. 그래도 매번 고민이 되더라고. 나이 먹고, 이렇게 사람들에게 멸시당하면서 싸움을 해야 하나? 국가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나? 체면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할 수 있을지. 투쟁한다고 길거리에 할매들 사이에 앉아 있을 때면 혼자서 고민을 많이 해.”

그러나 요즈음은 초전의 노인들도 조금 달라졌다. 고개를 끄덕여주는 이가 생겼다고 한다. 사드가 들어오면 소음 때문에 못 살 거라는 이들이 많다. 전자파 때문에 위험하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노인회장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미군부대 삼십년 경력으로 볼 때 사드로 인해 미군부대가 달마산 꼭대기에 위치하면 골프장 오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미군부대는 기름을 엄청나게 사용해. 왜관 미군부대도 시설을 잘 갖춰놨다고 큰소리치지만 주변 땅이며 물이며 얼마나 심각하게 오염되었는지 몰라. 시설을 갖췄다고 해도 새어 나가게 되어있거든. 그러니 하류가 오염되는 것은 당연하지. 상류에서 부대 유지에 들어가는 기름이 엄청난데. 그러면 이곳 소성리 땅이며, 계곡이며, 물이며 다 오염 돼서 쓰지 못하게 될 거야. 이거 진짜 심각하거든. 이거 밑에 사람 못살게 되는 거요.”

만약 대한민국을 위해 필요한 사드라면, 노인회장님도 마냥 반대만 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러나 누가 봐도 미국을 위해 필요한 사드를 우리 땅에, 노인회장님 고향 땅에 둔다고 하니, 팔을 걷어붙이고 반대할 수밖에 없다. 사드를 반대하는 매 순간, 길거리에 앉아서, 뙤약볕에 얼굴이 그을리면서, 나잇값을 못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 매번 질문하며 할매들 사이에 노인회장님이 우두커니 앉아있다. 가을을 시샘하는 늦여름 땡볕이 마을회관 마당에 화살처럼 내려꽂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