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1987] (1) 탈옥을 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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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류동인 씨가 기억하는 1987년의 기억을 매주 수, 목요일 연재합니다.]

<1987>이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보려고 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과 장소의 중심으로 보이는 것 같은 지점들 외에도 수많은 ‘1987’의 중심이 우리에게 있었음을 보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치열한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런 것들과 별 상관없이 살아가는 듯한 삶들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치열하다’ ‘비겁하다’라고 해석된 가치적이고 윤리적인 삶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다양한 삶을 관통하고 있는 생명에 대한 긍정과 욕망의 흐름, 그것의 표현으로 기쁨, 즐거움, 신명남, 매력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살았던 삶이 치열함, 숭고함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 순간의 기쁨으로 충만한 것이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긍정의 힘을 같이하고 있는 성주주민들의 투쟁과 삶에서 또한 느낍니다. 이는 매우 오래된 습속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감각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드반대투쟁을 하고 있는 나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영화 <1987> 가운데 한 장면.

1987년? 감방에 있어서 잘 모르겠다. 지금 밝히면 다칠만한 누군가가 탈옥하자고 해서 열라 계획을 짰다. 똥차를 탈취해 나가기로 했는데 운전할 줄 아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다음 날 6.29선언이 나왔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1987년 6월 28일로 기억한다. 기억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탈옥기도가 지속되지 못했던 이유는 6.29선언이었기 때문이다.

면회를 갔다 온 친구들, 그리고 우리들에게 은근히 밖의 소식을 전해주는 교도관들로부터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왔다.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대되었다는 것이었다.

감방 안 분위기는 시위가 확대되고 있다는 소식으로 들뜨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계엄령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이 깔려있기도 했다.

점심 무렵에 사동에 딸린 운동장 구석에 <옥중동지회> 동지들이 같이 모였다. <옥중동지회>는 감방 안에서 정치범들이 공동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계모임처럼 회장과 총무만 있는 조직이었다. 김민석이 회장을 내가 총무를 맡았다. 총무는 영치금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과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경직된 것이기도 한데 함께 생활하는 정치범들의 생활에 관여하는 것이기도 했다.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때였다. 김○○이 당혹스러운 말을 꺼냈다.

“밖에서 항쟁이 일어났는데 우리가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그럼 어쩌자고?”
“밖으로 나가 우리도 싸워야 한다.”
“나가자는 말은, 그러니까 탈옥하자는 이야기가?”
“그래”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충격적이고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그 말에 반대할 이유나 명분 같은 것은 제기될 수 없었다. 어쩌면 모두에게도 이미 그런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탈옥하기로 결정이 나 버렸다.

당혹감이 사라지자 본격적으로 탈옥의 방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감시대 교대 시각에 감시탑을 점거해서 탈옥하는 것도 검토했다. 하지만 감시자들이 들고 있는 총에 대한 걱정과 감시탑으로 올라간 후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과정에 대한 해결책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싸움이 생길 경우 다른 쪽 감시탑에서 그 모습이 훤히 보이는 문제가 있었다.

내가 똥차를 탈취해서 나가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교도소에는 정화조를 푸기 위해 분뇨차가 자주 들어왔다. 내가 똥차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사건이 있었다. 하루는 창밖에서 “펑”하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급히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한 사람이 머리가 홀딱 그을린 채로 멍하니 정화조 위에 앉아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분뇨차로 정화조를 청소하다가 맨홀 뚜껑을 열어놓고 담뱃불을 붙였는데 메탄가스로 인해 폭발하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도 머리와 얼굴만 그을리고 별다른 부상은 없었다. 그 뒤로 똥차가 들어오는 것이 눈에 자주 들어왔다. 똥차는 보통 보는 작은 차량이 아니라 15t 정도 되는 제법 큰 차량이었다.

“요사이 똥차가 자주 들어온다. 그걸 탈취해서 교도소 뒷문이 약하니까 차로 박고 나가자”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
“그럼 그렇게 하자.”
“근데 누구 운전할 줄 아는 사람 있나?”
“…….”

문제는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폐방시간이 되었다. 다음 날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탈옥 계획이 무산된 날 밤이 지나고 새벽, 감방 밖이 소란스러웠다. 철문에 난 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교도관이 사동 복도를 급하게 뛰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건장한 사람이 웃통을 벗은 채 몽둥이를 들고 절도 있는 폼으로 교도관을 쫓아갔다. 복도에 있는 사동 철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급하게 들려왔다.

“아뿔싸, 계엄군이 들어왔구나.”

우리들 대다수가 그렇게 추측했다. 정말로 암담한 새벽이었다. 하지만 아침이 될 때까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담당 교도관이 오고 모든 감방문이 열렸다.(당시 교도소와의 싸움을 통해 적어도 사동 안에서는 상당한 자유가 확보되어 있었다. 아침이 되면 정치범들이 있는 모든 감방 문이 개방되었다. 그러면 모여서 조회를 한 후 오전에는 모여 그룹 스터디를 하거나 홀로 공부를 하고는 했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농구나 축구 등 함께 모여 운동을 하였다.)

교도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를 물었다. 대답인즉슨 징벌방 등이 있던 위층에서 근무를 하던 교도관이 밤에 혁수정 으로 묶여 있던 수용자가 불쌍해서 문을 열어주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교도관의 몽둥이-경찰봉과 동일한 몽둥이-를 빼앗아 교도관을 두들겨 팬 것이다. 그렇게 맞고 있던 교도관은 우리들이 있던 아래층으로 겨우 도망을 온 것이고 그 뒤를 몽둥이를 들고 쫓아왔던 것이었다. 그는 또라이, 그러니까 정신 이상자라고 했다. 나나 다른 친구들은 그 또라이가 계엄군인 줄 알았었다.

감방 안에서도 이처럼 정신 차리기 힘든 코미디가 펼쳐진다. 그 일이 있고난 뒤 우리들만 있는 사동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눈 감아 줄 테니 그 교도관에 대한 징계는 하지 말아 달라고 교도소에 건의했다. 책임자가 그러마 했다. 교도관이나 재소자나 같이 갇혀 있다고 과부의 사정을 아는 홀아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스톡홀롬 신드롬 같은 것인지 몰라도 그렇게 알량한 인심을 베풀었다. 어찌 됐거나 그 교도관도 좋은 일을 하려다 생긴 일이었다. 어쩌면 계엄군에 대한 착각이 만들어냈던 긴장의 해소가 그런 인심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계엄이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었다.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되었다. 밖에서는 6월 항쟁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감방 안에서도 또 다른 1987년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