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전파도 닿는 황해도 사리원···성묘갈 날을 꿈꾼다

[추석 앞둔 북한이탈주민] (2) 대구시 동구 안금선 씨

18:29

[주=북한이탈주민들은 추석에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한다. 북한은 1988년 추석 당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다. 추석이면 묘지에 성묘 행렬이 늘어지는 풍경도 보였지만,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는 점차 행렬의 규모도 축소됐다. 배급 체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이웃과 음식을 나누거나 놀이를 하는 문화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추석을 ‘민족의 대명절’로 여기는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조상 섬김을 중요하게 여기는 북한 인민에게 추석은 여전히 중요한 날이다. 최근 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며 북한과의 교류 확대에도 기대감이 모이는 상황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심정은 어떨까. <뉴스민>은 대구·경산시에 사는 북한이탈주민 세 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안금선(48) 씨가 살던 황해북도 사리원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경의선이 지났던 도시로, 평양과 개성 사이에 있다. 남한 전파가 닿는 곳이라서, 금선 씨는 남한의 드라마를 즐겨봤다. 김종남(배우 김아중 연기)이 쇼 호스트로 인생 역전에 성공하는 이야기를 특히 감명 깊게 봤다. 한국 드라마에는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감을 자극하는 것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삶에 대해, 금선 씨는 경제적으로 나은 삶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군부에서 오래 근무했고 집안도 상류층에 속해,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별 탈 없이 지낼 만했다. 그보다는 한국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북한처럼 빈곤하지 않아 의식 수준이 더 높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탈북을 결심한 것은 의료 체계 때문이었다. 비장염으로 2년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동생 생각이 났다. 금선 씨의 아이 둘도 어릴 적, 병으로 모두 죽었다. 한국 드라마에서는 간을 뗐다 붙였다 하는 장면이 나왔다. 같이 드라마를 본 동생이 말했다. “언니 나 살고 싶어. 드라마에서 그런 것처럼 나도 치료 한번 받아보고 싶어”

한국행을 결심하고 남편에게 말했더니 수긍했다. 고위직이라 타지 출장을 다니며 약재를 구해 오던 어머니도 “자식을 위한 길”이라며 선택했다. 보위부 감시를 피하려 6개월간 치밀하게 준비했다. 2009년 11월 17일, 양강도 혜산시에서 압록강을 건너 길림성 장백현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에서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43일이 걸렸다. 동생 건강이 좋지 않아 한국에 오자마자 치료를 받았다. 비장염이 아니고 간경화였다. 간이식 수술을 받았고, 수술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때가 늦었고, 동생은 얼마 뒤 사망했다.

▲북한이탈주민 안금선 씨

금선 씨는 하나원 교육 이후 대구시 동구에 정착했다. 한국은 아무런 기반도 없는 ‘빈터’였다. 식당, 편의점, 주유소 등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해나갔다. 불합리한 대우를 받더라도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삶이 너무나 빡빡했다. 세 배는 더 노력해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금선 씨는 사회에 적응하며 한국에 품었던 기대도 다시 생각해봤다. 학사학위를 따는 동안 봉사활동에도 열정적으로 나선 금선 씨는 다른 학생들에게 봉사활동 개념이 조금 다른 것을 알게 됐다. 점수를 위해, 성적을 위한 봉사활동이었다. 그러면서 ‘사람 사는 동네가 거기서 거기구나’하고 생각했다.

2018년, 자격증을 취득하고 대구 동구 한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금선 씨는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최근 들어 요양원 일이 부쩍 늘었고, 오전 7시 출근해서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보면 하루가 금세 끝나버렸다.

남한 전파도 닿는 고향, 새가 날아가도 쉬지 않고 갈 수 있지만 금선 씨는 갈 수가 없다. 이민 떠난 사람은 고향을 찾을 수 있어도 이탈한 사람들은 갈 수 없는 곳. 남북 두 정상의 왕래는 잦아졌지만, 어딘가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종전선언을 한다면 너네는 너네, 우리는 우리, 그냥 그런 남의 나라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요즘 금선 씨는 고향이 부쩍 그리워졌다.

금선 씨는 언젠가는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날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번 추석에 당장 시아버지가 묻힌 평안남도, 아버지가 묻힌 황해북도를 방문할 수는 없다. 자식된 도리를 안 지키기에는 섭섭하고, 죄송스러웠다. 먼 곳에서 아실 지는 모르겠지만, 타향인 듯, 타국인듯한 한국에서 금선 씨는 성묘 대신 집에서 밥 한 그릇 떠 놓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