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장소의 위계에 대하여 / 이라영

10:13

‘조국 사태’ 혹은 ‘조국 정국’이라 불리는 이 상황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끝장이 나야 멈출 기세다. 서울에서는 광화문과 서초동이 ‘조국 사퇴’와 ‘검찰 개혁’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나는 조국이 아니’지만 현재 검찰 수사가 과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말을 보태기가 어렵다. 여러 맥락이 있으나 이 상황에서 계속 눈에 밟히는 한 가지는 지역의 위치다. 지금까지 이 ‘사태’에서 흘러나온 지역에 대한 발언들을 좀 정리하고자 한다.

“후보자의 딸은 멀리까지 매일 오가며”

조국 장관의 딸이 고등학생일 때 단국대 의대에서 수행한 인턴십을 통해 논문 제1 저자가 되었다. 이때 딸이 얼마나 성실히 임했는지를 설명하는 수사로 단국대 의대가 있는 천안의 위치가 강조된다. 멀리까지. 강남에서 단국대 의대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천안 가는 버스는 5분이나 10분 간격으로 있다. 단국대 천안 캠퍼스에 다니는 서울 학생들은 강남역에서 통학버스를 타고 매일 오간다.

물론 고등학생이 오가기에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물리적 거리를 가볍게 본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전하는 태도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매일 강남에서 통학버스를 타고 ‘서울 바깥’으로 나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얼마나 성실히 대학을 다니는지 강조하진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그들은 ‘인서울’에 실패한 학생들로 여겨진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속마음을 숨기는 발언이었다.

▲경북 영주 소재 동양대학교 (사진=조정훈 오마이뉴스 기자)

“서울에서 영주까지 내려가서”

본격적으로 지역 비하의 시각을 숨기지 못한 건 바로 경북 영주에 있는 동양대가 이 사건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강남에서 1시간 걸리는 천안이 그토록 먼 거리였으니 소백산 넘어 경북 영주는 얼마나 멀겠는가. 조 장관에 대해 무조건적인 옹호와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 영주까지 가서 활동한 사실을 대단한 시혜처럼 여겼다. ‘깡촌 대학’, ‘깡촌까지 가서’라는 표현이 서슴없이 흘러나왔다. 급기야 민주당 의원은 청문회 당시 과하게 ‘솔직한’ 태도를 보였다.

“고려대 학생이 유학을 가든 대학원을 가든 동양대 표창이 뭐가 필요하겠나, 솔직히 이야기해서”

다시 말하지만 나는 현재 검찰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를 지지하든, 옹호하든, 반대하든, 자신이 주장하는 개혁을 위해 다른 한 세계를 비하하는 태도를 얼렁뚱땅 넘길 수는 없다. 지역 비하, 학벌주의, 학력주의가 총동원된 개혁에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국회의원의 ‘솔직한’ 태도를 넘어 이제는 매우 유명한 작가가 노골적으로 비하 발언을 뱉었다.

“참 먼 시골 학교였다.”

이 표현에서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동양대학교가 공지영 작가의 마음속에서 굉장히 먼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한 강연장에서 전라도 해남에서 온 50대 남성을 만난 적 있다. 그때 장소는 서울 홍대 근처였다. 당일로 다녀갈 수도 없어 그는 서울에서 숙박을 해야 했다. 더욱 놀라운 건 한 달에 두 번꼴로 뭔가 배우기 위해 서울에 온다고 했다. ‘멀리까지’ 그를 오도록 만드는 힘은 바로 서울과 지역 간의 위계다. 흔히 지방 발령은 곧 ‘좌천’이다. 좌천은 낮은 곳으로 지위가 떨어짐을 뜻한다. ‘좌’가 왼쪽 좌임을 알고 의아했는데, 이는 과거에 왼쪽을 오른쪽보다 업신여겼기 때문이다. 위치가 가진 위계는 사람의 이동에 부여하는 의미를 다르게 만든다.

작년에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자유한국당 정태옥 의원이 이른바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살고, 망하면 인천 산다)이라는 해괴한 발언을 했다가 거센 비난을 받고 잠시 탈당한 적 있다. 수도권 내에서도 이처럼 섬세한 차별이 있다.

장소를 잘 다루는 작가가 좋다. 문학이나 미술에서 장소성이 강한 작품이 있다. 예를 들어 통영을 모르고 전혁림의 미술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토지>의 하동 평사리는 박경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세계다. 최인호의 ‘깊고 푸른 밤’에서 캘리포니아라는 장소는 이 소설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며 주제다. 미국 미시시피의 지역성을 문학의 세계에서 잘 구현한 유도라 웰티는 자신의 소설작법에서 장소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설의 감정 세계를 표현하는 사실 같은 공간일 뿐만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에 현실성을 부여”

“인간에게 상상력이 주어졌을 때부터 장소에는 정신이 깃들게 되었고, 인간이 한곳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은 장소에서 신의 존재를 발견했다.” (<유도라 웰티의 소설작법> 중에서)

웰티의 작품들은 인간주의 지리학의 관점에서 좋은 텍스트다. 장소는 단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곳에는 어떤 정신이 흐른다. 90년이 넘는 생의 대부분을 미시시피 잭슨에서 살았던 웰티는 다양한 지역에 살아본 적이 없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난 그도 학업을 위해 동부나 북부의 도시로 잠깐 ‘진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 돌보기 등 딸의 역할을 하며 독신으로 작은 지역 사회에서 긴 생을 살았다. 여행을 많이 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은 그 나름대로 확장된 세계를 쓸 수 있고, 다양한 경험이 없더라도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세계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눈을 기를 수 있다.

웰티에게는 바로 자신과 관계 맺은 지역이라는 그 장소가 그의 정체성의 일부다. “세상 전체에서 가장 심오하고 가장 감동적인 광경은 분명 얼굴” (‘클라이티’)이라는 표현처럼, 그는 미시시피 지역을 배경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문학으로 옮겼다. 실직 후 무기력과 제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임신한 아내를 살해하는 남성(‘마조리에게 꽃을’), 좁은 지역에서 지겨운 가족 간의 갈등에서 벗어나고픈 여성(‘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제 욕망을 따라 떠나거나 새로운 도전을 하진 못해도 꾸준히 피아노를 치며 단조로운 삶 속에서 제 세계를 꾸려가는 여성(‘6월 발표회’) 등 그 ‘먼 시골’에도 당연히 삶이 있다.

인간주의 지리학에서 ‘장소연구’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통해 장소성(sense of place) 혹은 장소 정체성(place identity)을 탐구한다. 하나의 인간을 형성하는 많은 조건 중에서 그가 딛고 선 장소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의구심이 없는 자는 타인의 장소에 대해 고민이 없다. 또한 지리적 위치가 가지는 정치적 역할에 무지하다. 지역 비하는 그 장소와 관계 맺은 많은 삶에 대한 의도적인 무지이다.

소백산 자락에 자리한 영주 성혈사 나한전의 꽃살문을 보자. 풍성한 모란과 단정한 연이 새겨진 나무 문살을 보노라면 어쩜 이리도 제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지키는지 감탄하게 된다. 누가 뭐라고 하든 이제 사과가 더욱 붉게 익어갈 것이고, 부석사의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 것이다. ‘깡촌’과 ‘먼 시골’이라는 위계를 무심히 비웃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