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농성장 가는 낯선 거리에서” 만난 김진숙의 동행인들

희망버스 송경동, 쌍용차 김정우, 가수, 신부, 의사까지
연대로 전하는 김진숙, 박문진과 깊은 인연 그리고 사연

20:17

29일 오후 1시를 조금 넘긴 시각, 대구 달성군 가창면 신천변. 일군의 사람들이 좁은 공터에 모여 삼삼오오 인사를 나눴다. 인사의 중심에는 그 사람, 김진숙 금속노조 지도위원이 있다. 지난 23일 불쑥, “내 오랜 친구 박문진이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176일째 매달려 있으니 앓는 것도 사치라 걸어서 박문진에게 갑니다”며 홀로 길을 나선 그다. 길을 나서며 그는 “박문진 힘내라”고 쓴 둥근 팻말을 들었고, 이날도 그는 똑같은 팻말을 들고 수많은 동행인을 맞았다.

▲동행인들을 맞이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왼쪽 뒷모습) 앞으로 김정우 전 지부장과 송경동 시인 서 있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김해에서, 고양에서. “그가 혼자 걷게 할 수 없었다”는 동행인들이 이곳으로 찾아들었다. 그중에는 2011년 김 지도위원이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의 크레인 위에 올랐을 때 ‘희망’을 버스로 배달했던 송경동 시인도 있다. 송 시인은 이번에는 40여 명의 ‘동행’을 버스로 데려왔다. 오전 8시에 서울을 떠난 버스는 오후 1시를 조금 넘겨 김 지도위원이 있는 가창면에 닿았다.

“김진숙 선배가 길을 나섰다는 이야길 듣고, 고공 농성장에서 투쟁하는 우리 박문진 동지 이야길 듣고 마음이 답답해서 주변에 이야길 했어요. 연대라는 게 다른 게 아니라 몸으로, 다리로, 손으로 하는 것만 한 연대가 없으니까. 내려가보자 하니 다들 같은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급하게 준비해서 어제(28일) 하루 알렸어요. 웹자보 만들어서. 마흔 여분이 같이 왔어요”

송 시인은 2018년 초에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조사에 참여하면서 김 지도위원과 만난 후 1년여 만에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당시 진상조사위는 경찰이 조직적으로 희망버스를 ‘절방버스’, ‘고통버스’라고 조롱하는 댓글이나 글을 인터넷에 올린 사건을 조사 중이었다. 송 시인은 “그때 만나서 이런저런 말씀 듣고, 오늘 다시 고공농성장으로 가는 낯선 거리에서 만나게 됐다”며 “정권은 바뀌었다는데 노동자들의 삶은 바뀐 게 없는 거 같다”고 말했다.

송 시인은 “내려오는 버스에서 한 참가자분이 오늘 내려가는 건 이 마흔 여 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마음이 같이 내려가는 거라고 하셨다”며 “그게 맞을 거다. 늦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걸어서 고공에 있는 동지들이 명예 회복하고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 정도의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도록 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김정우 전 지부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정우 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도 서울 동행버스에 몸을 실은 40여 명 중 한 명이다. 오랫동안 해고자 생활을 한 김 전 지부장은 해고 투쟁 과정에서 김진숙, 박문진 두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올라있던 2011년 7월, 김 전 지부장은 평택에서 약 400km를 걸어 부산에 갔다. “하루 54km, 55km. 12시간, 13시간 걸어서 9일 만에 갔으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했었죠. 아픔들이 있어서, 저도 김진숙 지도위원 동지에 대한 사랑은 깊죠” 김 전 지부장이 담담하게 인연을 설명했다.

박문진 지도위원과도 김 전 지부장은 인연이 깊다. 2012년 대통령 선거가 있던 시기에 박문진 지도위원은 당시 박근혜 후보의 집 앞에서 3,000배 절을 하는 투쟁을 했고, 김 전 지부장은 서울 대한문 농성장에서 단식 투쟁을 했다. 김 전 지부장의 단식은 41일째 되던 11월 19일 건강 악화로 중단됐고, 박 지도위원의 3,000배는 선거 하루 전까지 이어졌다. 10월 23일부터 12월 18일, 57일 17만 1,000번의 절이었다.

“대한문 싸움할 때 박문진 지도위원은 박근혜 집 앞에서 매일 3,000배 했고, 계속 동행하며 움직였던 인연이 있어요. 대한문이란 곳이 그땐 쌍용차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곳이 아니라 많은 시민이 아픔을 달래는 곳이었다고 느끼거든요. 이래저래 많은 사람이 머무르고 스쳐 갔지만 그때 인연이 굉장히 깊은 인연이 아니었나 느껴져요. 김 지도위원도, 박 지도위원도 나이가 있는데, 아프지 않게 건강하게 내려왔으면 하고, 반드시 원직 복직해서 그때 다시 우리가 오도록 해야겠지요”

김 지도위원과 마찬가지로 부산에 거주하는 서영섭 신부(꼰벤뚜알프랜치스코수도회)는 지난 27일부터 도보 행진에 합류했다. 역시 김 지도위원이 크레인 농성을 할 때 인연을 맺게 된 서 신부는 김 지도위원의 도보 행진 소식을 듣고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암 투병 중인 김 지도위원이 길을 나서게 한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도 느꼈다.

“김 지도위원이 도보한다는 이야길 듣고 한 대 맞은 느낌이었어요. 한발 늦었다는 느낌? 영남대병원이 오래전부터 싸움이 시작됐는데, 왜 아픈 사람이 나서게 했나 하는 죄책감이 컸어요. 주변 사람들은 알거든요. 원래 성격이 고집스럽고, 하고자 하는 일에 흔들림이 없다는 걸. 말려서 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절박함을 아는 사람이 절박함 때문에 나선다는 걸 다시 느꼈어요. 지도위원이 아니어도 건강한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에 대한 공감을 함께 하고 지역사회에서 움직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숙제가 던져진 거죠”

암 투병을 한 김 지도위원에 대한 걱정은 김동은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획국장도 마찬가지였다. 김 국장은 28일 청도에서 시작한 도보 행진부터 합류했다. 김 국장은 “치료가 끝났지만 100km 넘는 거리를 추운 날 걷는 건 무리일 수 있거든요. 혹시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걷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 국장을 비롯한 대경인의협 회원들은 고공농성 중인 박 지도위원의 건강도 챙겨왔다. 이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 농성장에 올라 박 지도위원의 건강 체크를 했다. 김 국장은 “고공에 장기간 있으면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기 어렵고, 워낙 좁은 공간에 있어서 운동을 할 수도 없어서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무엇보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심리적으로 상당한 고통이 남을 수 있어서 심리 상담하는 선생님과 함께 올라가서 살펴보고 있어요. 체력도 떨어지고 심리적으로 힘든 상태여서 걱정이 되죠. 건강에 큰 문제 없이 어서 해결되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영남대의료원에 도착한 행진단이 멀리 보이는 박문진 지도위원의 농성장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가까스로 마지막 행진에 동참한 사람도 있다. 거리에 선 노동자를 위해 노래하는 가수 임정득 씨는 오전 10시 홀로 기차에 올랐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그는 김 지도위원 도보 행진이 다음 주까지는 이어질 거라 예상했다가 오늘이 마지막이란 소식을 듣고 서둘러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낮 12시 50분쯤에 동대구역에 도착한 그는 오후 2시를 조금 넘겨 도보행진단 1차 휴식처인 수성구 파동 행정복지센터에서 합류했다. 그 역시 김진숙, 박문진 두 사람과 인연이 남다르다. 특히 그가 직접 만든 노래 ‘소금꽃나무’는 김 지도위원의 책을 통해 탄생한 노래다.

“한진중공업이나 영남대의료원은 아무래도 저한테 다른 사업장보단 마음이 가는 곳이에요. 제가 혼자 노래를 하기 시작했을 때 한진중공업에 대뜸 ‘노래하고 싶다’고 찾아가서 인연을 맺었고, 소금꽃나무 책을 냈을 때 노래도 만들었어요. 그 노래가 사람들이 임정득이라는 가수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영남대의료원은 예전 투쟁할 때부터 거리 공연을 하기도 했구요. 이번에 두 번 정도 요청이 있었는데 일정이 안 맞아서 못 왔었어요. 마음의 짐처럼 남았는데,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안 오면 안 될 것 같았고, 그냥 오고 싶었어요”

그는 이날 오후 영남대의료원에 도착해서 진행된 집회에서 예정에 없던 무대를 가졌다. 역시 선곡은 ‘소금꽃나무’였다. “하얗게 피어난 소금꽃 / 눈부신 열매를 맺고도 / 가질 수 없는 슬픔에 / 다시 꽃을 피워내는 그대여 / 하얗게 피어난 소금꽃 / 눈부신 열매를 맺고서 / 두 팔을 활짝 펼치고 / 저 거친 세상 속으로 / 저 지친 어깨에 / 흐드러진 꽃을 피우는 그대는 / 소금꽃 나무” 고된 하루를 함께한 동행인들이 함께 노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