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 이야기] (4) 소금단지 안의 달걀 / 황규관

17:59

영화감독 황윤에 의하면 “자외선과 햇빛은 바이러스를 없애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햇빛에 직접 30분만 쏘이면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는 완전히 활동을 멈추지만 그늘에서는 며칠간 지속될 수 있고, 습기를 머금은 거름에서는 몇 주도 버틴다.” 이 글(경향신문 2016.12.15)은 조류독감이 퍼지자 양계장의 닭들을 살처분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쓰였는데, “현재 고기를 위해 길러지는 닭들은 햇빛이 닿지 않는 밀폐된 축사 안에 수십만 마리가 수용돼 밀집 사육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시작된다. 이런 현실에 대한 대안은 닭에게 마당을 내주는 일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군의 생태주의자들은 공장식 축산을 비판할 때 ‘동물복지’라는 개념을 꺼내 들지만, 닭들에게 마당을 내어주는 것은 단순한 ‘동물복지’ 차원을 넘어선다. 일테면 봄날 마당에서 배회하듯 노는 닭들을 보면, 아마도 당신의 영혼도 햇볕에서 어느새 뒹굴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닭을 마당에게 내어준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마당을 내어준 것과 진배없는 것이다.

오늘날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달걀은 인간의 영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하나의 상품, 더 좁혀 말하면 식재료일 뿐이다. 우리의 삶과 닭의 삶이 절연되었을 때 이런 현상은 벌어진다. 외양간에서 되새김질을 하는 눈동자를 가진 소와 인간이 절연되었을 때 소가 고깃덩어리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존재와 존재 사이의 구체적 관계가 사라지면 각 존재는 서로에 대해 소외되며 물화된다. 관계 자체가 존재인 것이니 관계가 타락하면 존재의 값에 미달되는 사태가 벌어지기 마련이다. 다른 말로 하면, 동물에게 적용하는 복지도 사실 다른 생명체와 절연된 상태를 건드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펼쳐지는 개념에 가깝다.

우리는 우리의 노동력을 팔아 화폐를 얻고, 이 화폐를 통해 노동으로 고갈된 생명력을 보충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데, 달걀이나 육류 같은 식품이 가장 기초적인 물질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양소도 하나의 상품으로 구입한다는 뜻이 된다. 달걀이나 육류에 함유된 영양소가 하나의 상품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상품인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생산하는 공정 자체가 우리의 정의 개념에 부합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생산하는 주체(닭, 돼지, 소 등)에게도 햇볕과 바람을 쐴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권리 문제가 존재 문제까지 해결해주는 못 한다는 점은 짚어둘 필요가 있다.

▲어머니는 달걀을 꼭 소금단지 안에 묻어 두었다. (사진=https://pixnio.com/)

어머니는 달걀을 꼭 소금단지 안에 묻어 두었다. 달걀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어린 나는 그게 꼭 내 눈길과 손길을 피해 그러시는 것 같아 섧다는 기분도 들었다. 어머니가 소금단지 안에서 달걀을 꺼내는 것을 본 후로 종종 달걀 한 알을 꺼내 아랫니로 톡 깨서 쪽 빨아먹고는 껍질은 멀리 풀밭에 던져버렸다. 그래야 감쪽같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꺼내 먹으면 티가 나니까 어쩌다 한두 개 정도는 꺼내 먹었다. 달걀은 꼭 필요한 일이 벌어질 때에만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물론 당신은 생전에 살갑게 달걀 한 알을 내게 쥐여줘 본 적이 없다. 돌이켜 보면 내가 달걀을 훔쳐 먹은 것을 어머니가 모르셨을 리는 없다. 다만 표가 나면 언짢은 일이 벌어지니 적당히 눈치는 남기셨기 때문이다.

전주 외곽의 좁으목이란 동네에 살 때, 그러니까 내가 두어 살 때부터 아홉 살까지 산 집에서는 변소를 함께 쓰는 앞집에서 변소 귀퉁이에다 닭 두 마리를 키웠다. 예닐곱 살 즈음의 어느 날 나는 그 닭이 알을 낳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루는 닭장 안에 달걀이 두 개가 있어서 하나를 훔쳐 먹고 나머지 하나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시치미를 떼며 아주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아주머니는 ‘하나밖에 없냐?’ 이리 물었고, 나는 ‘네, 하나밖에 없었어요’라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상하다, 닭은 알은 두 개 낳는데···’ 하는 말씀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말았다.

나는 그 일 이후로 한동안 닭이 알을 두 개씩 낳는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두 마리가 다 알을 낳거나, 아니면 알을 꺼내오는 것을 하루 안 하셨던 것 같다. 다행인 것은 그 아주머니가 어린 나를 그렇게 야단치지 않고 당신이 속아 넘어가 준 일이다. 만일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했더라면 나는 정말 되게 혼났을 것이다.

그 당시 홀로 누나와 나를 키우던 어머니는 나의 ‘옳지 않은 짓’에 대해서는, 일테면 남의 것을 훔친다든가, 거지처럼(어머니 표현이다) 남이 먹는 것을 바라보면서 정신을 놓는다든가 하는 일에는 단호하셨다. 서울살이가 시작된 20대 중반까지도 길에서는 먹을 것을 먹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은 어머니가 ‘길에 다니면서 뭘 먹는 일은 추접스런 것’이라고 가르쳐 놨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너도나도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으니 남들 앞에서 먹을 것 자랑하지 말라는 염치가 숨어 있는 것도 같고, 음식 자체는 집 안에서 먹는 것이라는 다소 완고한 관념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그 이후로 닭을 몇 번 기른 적도 있었지만 달걀은 여전히 귀한 것이어서 달걀 프라이나 달걀말이는 소풍 갈 때나 한번 먹을까 말까였다. 닭을 키워도 온전히 알을 낳기까지 키우는 일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아리를 사 오면 아랫목에 종이 상자를 놓고 키워야 했는데, 병아리들이 중닭이 되고 알을 낳는 정도까지 자라려면 손도 많이 갔고 병들어 죽어 나가는 일도 태반이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대 여섯 마리나 남아야 그나마 위안 삼을 정도였다. 거기다 무슨 대소사라도 있어서 잡아먹다 보면 고작 한두 마리나 남았을까.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겠지만 나는 자족적인 경제 구조를 상상할 때 곧잘 농사 지향적이다. 예컨대 이런 정도다. 논 천 평, 밭 이백 평, 염소 세 마리, 개 한 마리, 닭 네댓 마리···. 논 천 평이면 4인 가족 기준 1년 양식이 나오고 밭 이백 평 정도면, 농사짓기가 만만치 않아서 그렇지 적잖은 채소와 곡물 수확이 가능하다는 경험에 의한 추측이다. 그렇다면 다른 가축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이 거둬들인 나머지들, 또는 먹다 피치 못하게 남게 될 음식의 여분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움직이는 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감정이 인간 안에만 매몰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확실히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야 그나마 인간 노릇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다른 생명체와 함께 사는 생활 구조는 경제적인 이유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철학적 깊이도 확보해준다.

어머니가 소금단지 안에 묻어놓은 달걀은, 어쩌면 어린 나의 손아귀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노동력, 최소한의 자족적인 경제구조를 위해 필요한 노동을 위한 단백질 섭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의 우리 집의 농사는 그 소출량이 시장에 내다 팔만큼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냥 자급자족 수준이었다. 따라서 달걀은 가장 적절하게 그리고 마땅한 사람에게 배분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금단지 안에 묻어둔 달걀은 언제나 어린 나의 탈취 대상이기도 했다. 내게 달걀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고소하고 비릿한 감각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했고, 가난으로 인한 심리적 울적함을 달래주는 질감과 곡선을 가진 살아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뜻밖에도 우리에게 진짜 문제는 언제나 지식의 증대, 혹은 살진 문명일지 모른다. 살진 문명은 사물을 사물 자체로 느끼거나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특성이 있다. 사물은 끊임없이 효과와 효용으로 환원된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사는 문명 세계가 경제적 부를 증식하는 일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체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닭이 마당을 거닐면서 마당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상품을 생산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이 문명 세계에 적합하다면, 닭이 A4지 한 장 크기 공간에 갇혀 지내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것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문명 세계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거대한 그림자를 괴물처럼 키우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점점 기괴해지는 문명의 그림자에 대한 처방은 사실 햇볕과 바람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햇볕과 바람이 세상의 모든 그림자를 없애는 것도 결국 ‘음’을 부정하는 ‘양’의 폭력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문명의 그림자는 존재의 ‘음’이 아니라, 도리어 존재의 ‘음’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의 세계는 바이러스나 세균도 생명의 형태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지만, 문제는 그 바이러스와 세균이 우리와 공존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우리와 공존 불가능한 바이러스나 세균도 생명체가 맞지만, 그것은 문명의 그림자에서 파생된 ‘검은 전사’이며 문명의 편의에 익숙해진, 아닌 그 편의를 무리하게 조장해온 인간에게 맞서는 전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작은 마당이 필요하다. 그 마당으로 비가 내리고 눈이 쌓인다. 햇볕이 머물고 바람은 휭 지나간다. 마당은 그러나 텅 빈 공간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이 살면서 움직이는 공간이다. 살아 있는 존재가 없으면 공간이 아니며, 그렇게 되면 시간도 흘러가지 않고 고이고 만다. 닭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는 장면은 동화나 추억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꿈꾸어야 할 구체적인 세계이다. 지금은 이런 상상 자체를 시대착오적이라고 부르겠지만, 반려동물이 도시인들의 곁을 갈수록 더 차지하고 있는 현상을 보면 아무래도 인간은 인간끼리만은 살기 힘든 게 분명하다.

몇 해 전에 일 때문에 전주에 갔다가 잠시 짬을 내 옛 살던 동네에 들러봤는데, 모든 것은 다 변했어도 우리가 살던 집은 그대로 남았고, 변소 귀퉁이에 닭을 키우던 앞집도 그대로 온존해 있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이루어야 할 시간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어떤 징표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 생긴 도로 이편에서 하얀 회벽이 빛나는 그 집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서야 했다. 새로 생긴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행렬이 쉽게 건너지 못할 심연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