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7) 다섯 번째 저승 문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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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연재>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 섣달그믐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2) 잠과 밥 / 설날 / 정월 초이틀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3) 피난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4) 청연학살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5)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①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6)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②

■ 다섯 번째 저승 문턱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과 같기도 하지만
고래 심줄처럼 질기기도 하다
질긴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쨌든 먹어야한다
정월 초하룻날 포식을 하고 탈이 났는데
이제껏 변변한 밥 한 끼 먹지 못했다
마을은 비어있고 생각나는 사람은
먼 길이라 갈 수 없는 모지랑 할머니뿐이다
어제 가려다가 군인들 때문에 가지 못했다
따뜻한 방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눈은 발목까지 빠지게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할머니 집을 행해 맨발로 뛰었다
방문 앞에서 발이 시려 팔딱 팔딱 뛰었다
할머니는 퍼뜩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어디서 잤느냐?”
“밥은 먹고 다녔냐?”
“니 아버지는 어제 군인들 짐 지고 가던데 만났나?”
“아이고, 얼매나 배가 고프겠노.” 하시면서
윗목에 밀쳐놓은 밥상을 끌어당겨
꽁꽁 언 밥을 김치하고 먹으라며 주셨다
먹지 못하고 멍하니 내려다보는데
밖에서 느닷없이 “정추 띠기!” 하고 불렀다
안동 김 씨의 맏며느리이기도 하고
어른들과 친히 지내는 어머니 친구 분이
동생 또래의 아이를 업고
보따리를 이고 피난을 가면서 할머니를 부른 것이다
“와요? 어디로 가요?”
나는 잘 듣지 못했는데
외가 방향으로 간다고 한 모양이다
“그러면 야 좀 데리고 가소. 퍼뜩 따라 가거라!”
하늘은 잔뜩 흐려 함박눈을 쏟아붓는데 맨발이다
그토록 아끼던 건빵을 집에 두고 왔는데
발은 시리고 배는 고파 죽을 것 같았다
눈 위를 걸어가다 죽으나 굶어서 얼어 죽으나
매 한가지일 것 같았다
내 목숨은 이제 하늘에 맡겨졌다

할머니의 성화에 아주머니를 따라 나섰는데
발목까지 빠지는 눈은
맨발을 칼로 도려내듯이 시리고 아팠다
내동 마을을 벗어나면
사천 냇물에 노둣돌이 띄엄띄엄 놓여있다
건너편 오른쪽으로는 청연으로 가는 길,
바로 올라가면 갓짐재로 가는 오르막길,
두 갈래 길이 나있다
그 갈래 길 언덕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기에 소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소나무 밑에는 눈이 없었다
발이 아예 없어지는 것 같이 시려서
죽을 것 같았다
죽어도 더 이상은 갈 수 없었다
흙바닥에서 단련된 맨발인데 눈 위에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너무 발이 시려서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나무 밑에서 죽을 것처럼 날뛰니까
저만큼 가던 아주머니가 되돌아오셔서
“아이고 어쩔까나. 얼매나 발이 시렵겠노.”
봇짐에서 버선 한 켤레를 꺼내주며
“이거라도 신어 보거라.” 하셨다
버선을 낚아채듯이 받아서 얼른 신었다
버선을 신으니 신기하게도 발이 시리지 않고 편했다
그러나 낡은 버선이라 얼마 못 가서 바닥이 다 닳았다
발바닥은 얼어서 감각이 점점 둔해졌다
발등만 덮고 있는 너덜너덜한 천 조각에
눈이 똘똘 맺혔다
그것이 발바닥에 밟히니 벌이 쏘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이를 악물며 참았다
지긋지긋한 어제 그곳을 다시 지나가는데
죽은 사람들이 눈에 덮여있었다
그 위를 까마귀 떼가 새까맣게 앉아
시체들의 눈알을 파먹고 있었다
어머니와 작은형과 동생도 저기에 있다
그런데 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무섭다
어머니가 시체 더미에서 나와서
내 발목을 잡아당길 것만 같았다
나는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머니와 형과 여동생이 이승을 떠난 지 겨우 하루 만인데
무서워서 온몸이 졸아들었다

청연에서 남상면 무촌리 매산 마을로 가는 내리막 산길에는
큰 소나무들이 울울창창하여 늘 어두침침했다
산짐승이라도 나올 것 같아 무서웠다
발바닥은 감각이 거의 없었고 힘도 빠져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아주머니 뒤만 졸졸 따라가다가
매산 마을 옆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곳은 신원과는 달리 길에 눈도 없고
강풍에 눈보라만 휘날릴 뿐이다
발에 걸려있는 버선을 벗어던지고 잠시 쉬는데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사르르 땅속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듯했다
이틀 동안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추위에 떨기만 하였다
굶는 데는 이골이 났으나 추위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시 숨을 돌린 아주머니는 얼른 가자고 성화를 내는데
나는 서서히 천야만야한 절벽 아래로 빠져들고 있었다
“야야, 어서 일어나거라.”
“너거 외갓집 다 왔다. 퍼뜩 가자!”
아무리 깨워도 꼼짝을 안 하니까 아주머니는
“아이고, 어쩔거나. 다 와서 죽을랑가배.”
벗어던진 버선으로 눈을 끌어와서 덮어주셨다
“까마귀가 안 달려들어야 할 낀데. 밤이 되면 산짐승이 해코지할 낀데.”
아주머니는 혼잣말을 하시며 사라졌다
6.25 이후에 하도 사람이 죽어서
저승사자가 바빴는지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을 잊었는지
다섯 번이나 저승의 문턱까지 가서 또 살아났다
너무 울어 눈물도 말라붙었다
먼 산에서 까마귀들이 미친 듯이 울었다

남상면 무촌리 외가 마을이 멀리 보였다
춥다
발바닥이 쓰리고 아프다
일어설 수가 없다
엉금엉금 기어간다
저 멀리 어느 아주머니가 오고 있다
어젯밤에 군인들이 묵었던 고모집의
고종사촌의 형수씨였다
내동에서 무촌리로 피난을 왔다가
피난을 아직 덜 온 내동 식구들의 마중을 나오는 길이었다
앞서간 아주머니를 만나서
내 얘기를 듣고 달려오시는 길이라고 했다
어머니를 만나 것 같이 반가웠다
형수씨는 나를 들쳐 업었다
형수씨의 등을 따스했고 참 포근하였다
어제 청연골에서 죽은 사람들 이야기와
밤에 형수네 집에서 군인들과 같이 보낸 이야기를 해주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군인들을 만나면 죽이니
절대로 가지 말라 했다
형수씨는 나를 외가 앞 신작로에 내려놓고 되돌아갔다
멍청하게 서있는 나에게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고맙다는 말이나 잘 가시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