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감출 수 없는 삶의 궤적, ‘폭력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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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스낵바를 운영하는 톰 스톨(비고 모텐슨)은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에디 스톨(마리아 벨로), 영리한 아들 잭 스톨(애쉬튼 홈즈), 귀여운 딸 사라 스톨(헤이디 헤이스)과 안온한 일상을 보낸다. 톰은 어느 날 자신의 가게에 들이닥친 무장강도를 해치워 마을의 영웅이 된다.

영업을 끝낼 쯤 가게에 들어선 남성 2명은 총과 칼로 손님과 직원을 위협한다. 직원이 생명을 잃을 위기에 놓이자, 톰은 전광석화와 같은 솜씨로 두 강도를 죽인다. 순식간에 몸을 날려 폭력을 휘두른 톰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다. 톰이 해치운 두 남성은 작은 음식점을 주된 범행 대상으로 삼는 잔인한 무장강도인 탓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이들은 작은 음식점에 침입해 주인 부부와 이들의 어린 딸까지 살해한다. 도시의 영웅으로 떠오른 톰은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된다.

하지만 유명인사가 되면서 위기도 찾아온다. 손님을 맞느라 분주한 톰의 앞에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의 갱단 두목 칼 포가티(에드 해리스) 일당이 들어선다. 칼은 톰을 향해 ‘조이’라고 부른다. 조이는 미국의 동부에서 악명 높은 갱단의 킬러다. 톰은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하지만, 갱단은 톰의 주변을 맴돌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불안감에 휩싸인 톰의 가족들은 점점 톰이 조이일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갱단의 등장으로 가정적이고 친절한 톰이 폭력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톰과 그의 가족은 점점 예민해지고 갈등을 겪는다. 톰의 아내 에디는 공포에 휩싸여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모범생이던 아들 잭은 학교에서 폭력을 휘둘러 정학을 맞는다.

정체를 숨기던 톰은 자신의 집에 아들 잭을 인질 삼아 총을 들고 나타난 갱단 앞에서 폭력의 본성을 드러낸다. 톰은 과거에 갱단 사이에서 유명한 킬러 조이 쿠삭이었다. 톰의 친형은 미국 동부의 큰 갱단 두목 리치 쿠삭(윌리엄 허트)이다. 진실이 밝혀진 뒤 아내 에디는 10년 넘게 같이 살아온 남편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점에 두려워하고, 아들은 자상한 아버지가 실은 잔혹한 갱단의 킬러였다는 점에 실망한다. 톰은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려 과거의 조이로 돌아간다.

캐나다의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이 연출한 <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 2005년)>다. 동명의 그래픽 노블이 원작이다. 스토리 작가는 저지 드레드로 유명한 존 와그너, 작화가는 빈센트 로크다.

영화는 인간의 폭력성을 소재로 삼았다. 마을의 영웅은 폭력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과거를 숨기고 선한 시민으로 변신한다. 거리낌 없이 총을 쏜 톰에게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폭력의 대상이 악한이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톰의 폭력을 정의의 수단으로 찬양한다. 안타까운 건 톰의 폭력이 아들 잭에게 대물림된다는 점이다.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잭은 아버지의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한다.

크로넨버그 감독은 인간의 욕망과 억압, 소외라는 주제를 파격적인 소재를 통해 구현해왔다. 그런 그가 폭력은 주체가 모호해지고 일상화된 데다 순환고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끔찍해졌다고 본다.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이며, 누가 선하고 악한지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영화에서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을 사는 톰은 선량해보이지만 다급해지자, 가족에게도 ‘조이’의 모습을 드러낸다. 행적이 쌓인 삶의 궤적은 숨길 수도, 감출 수도 없다. 멋진 얼굴을 타고났어도, 삶이 추하다면 결국 그 모습이 밖으로 드러날 것이다. 삶의 태도가 그 흔적을 새겨주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어떤 삶’이 쓰여 있나?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