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남자들의 판타지, ‘노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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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남성 허치 맨셀(밥 오덴커크)의 일상은 무료하다. 운동하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버스로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잠을 잔다. 일주일은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된다. 지루한 일주일 일과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대하는 가족의 태도다. 아내는 “또 쓰레기차를 놓쳤느냐”며 눈치를 주고, 사춘기를 겪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무심하다. 그날 저녁도 별일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일상을 깨는 소리가 들린다. 무장 강도 2명이 집에 침입한 것을 예감한다. 허치는 골프채를 쥐고 대비하지만 자신을 겨누는 총구에 멈칫한다. 테이블에 놓인 현금 몇 장과 손목시계를 내어주고 보내려던 찰나, 아들이 강도에게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인다. 나머지 한 명만 제압하면 되는데 어쩐 일인지 그들을 보내준다.

“20달러와 낡은 시계를 훔쳐 갔다고요? 맨셀 씨. 저항은 해보셨나요?” 경찰이 묻는다. “아뇨.” 아들은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저항 한 번 못한 아버지를 원망한다. “싸워볼 순 있었잖아요, 아빠.” 그 후 아내와 아들은 허치에 대해 실망한다. 새 차를 뽑은 이웃과 회사 동료인 처남은 허치를 겁쟁이 취급한다. “놈들을 제압할 기회가 있었다며? 근데 왜 놓쳤어? 그쯤은 식은 죽 먹기잖아.” 어린 딸만 유일하게 아버지를 듬직하다고 토닥인다.

참고 또 참아도 화가 나는데 그래도 참아보려고 애쓰던 다음날 저녁, 딸이 말한다. “아빠 내 고양이 필찌가 없어졌어.” 허치는 가족을 건드린 이들을 응징하러 찾아 나선다. 하지만 무장 강도는 어린 자녀를 둔 부부였고, 꾹 참고 밖으로 나와 애꿎은 벽에 화를 푼다. 허치는 분노를 쏟아내지 못하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그런데 자신이 탄 버스에 행패를 부리는 동네 양아치 일당을 보고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일상에서 참고 억눌렀던 분노를 참지 못해 벌어진 사건 탓에 허치는 러시아 갱단과 맞서 싸워야 할 정도로 일이 커진다. “지하실에 들어가 있어.” 가족과 저녁을 먹는 도중 집에 들이닥치는 갱단을 본 허치는 가족들을 지하 벙커에 피신시킨다. “대체 무슨 일인데?” 불안해하는 아내에게 허치는 말한다. “911 부르지마.”

<노바디(Nobody)>는 1인칭 SF 액션 영화 <하드코어 헨리(2016년)>를 연출한 신예 일리야 나이슐러가 감독을 맡았다. <존 윅 시리즈>의 작가 데릭 콜스타드가 각본을 썼다. <존 윅 시리즈>와 <아토믹 블론드(2017년)>, <데드풀2(2018년)>, <분노의 질주:홉스 앤 쇼(2019년)>의 연출, 제작한 데이빗 레이치가 제작을 맡았다. 주인공 허치를 연기한 밥 오덴커크는 미국 인기 코미디쇼 SNL의 작가 출신 배우다. 한국으로 따지면 키가 13㎝ 더 크고 얼굴도 긴 유병재 같은 셈이다. 악당 율리안은 <리바이어던(2015년)>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 알렉세이 세레브리아코프가 맡았다.

<노바디>는 액션으로 유명한 제작진이 맡은 만큼 화끈한 액션으로 가득하다. 버스에 난입한 동네 양아치들과 액션은 현실성이 짙다. 몸이 덜 풀린 탓인지 두들겨 맞기도 많이 맞고, 창밖으로 던져져 나뒹굴기도 한다. 이후 집과 회사에서 벌어지는 액션에서는 총을 다루는 솜씨가 현란하고 통쾌하다. 액션신마다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은 액션 분위기를 더 생생하게 만든다.

현실감 있는 액션, 보잘것없어 보이는 인물을 잘못 건드렸다가 호되게 당하는 악당들. 영화는 <존 윅(2015년)> 세계관과 닮아 있다. <데드풀2>처럼 총을 쏘고 피가 튀기는 중간에서도 병맛 개그를 선보이기도 한다. <존 윅 시리즈>와 차이점은 주인공이 싸움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다. 아내가 남긴 선물인 개가 죽은 나머지 비통한 마음으로 복수에 나선 존 윅과는 정서가 사뭇 다르다.

영화는 많은 남성들이 꿈꿔왔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판타지를 대리만족 시켜준다. 영화의 색감은 어둡고 차가운 톤으로 시작했다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따뜻한 톤으로 변화하는 묘사로 허치의 심리를 표현한다. 개연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관람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다. 장르의 재미만을 놓고 본다면 과소평가할 영화는 아니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