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디즈니의 변화와 함께 등장한 주체적, ‘크루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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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엘라 드 빌(Cruella De Vil)은 1956년 영국의 여배우이자 사업가, 작가인 도디 스미스가 쓴 소설 <101마리 달마시안>의 등장인물이다. 디즈니는 1961년 이 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1996년에는 실사영화로 개봉됐다. 4년 뒤 <102마리 달마시안>이란 제목으로 후속편이 나왔다.

크루엘라는 패션 디자이너다. 그는 모피 코트를 즐겨 입는다. 목표는 런던의 강아지들을 납치해 가죽 코트를 만드는 것이다. 이상한 야심만큼 외모도 괴상하다. 머리카락의 반은 흑발, 나머지 반은 백발이다. 크루엘라의 외모는 프랑스의 신체 행위예술가 오를랑이 흉내내기도 했다.

크루엘라는 악당이다. 그의 눈에 무명 작곡가 로저 래드클리프의 반려견 달마시안 퐁고가 들어온다.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달마시안의 가죽을 벗기려 납치극을 벌인다. 실사영화에서 크루엘라는 베테랑 배우 글렌 클로즈가 맡아 호연을 펼쳤다.

디즈니는 2021년 악당 크루엘라 드 빌의 성장기와 성공기를 다룬 영화를 내놓았다. 일부 언론은 악당 솔로 영화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일컫는다. 맞는 말이다. 영화는 매력적이다. 영국 소도시에서 엄마(에밀리 비샴)와 함께 살던 에스텔라(엠마 스톤)는 패션 감각이 비상한 아이다. 하지만 흑백으로 나뉜 머리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괴물이라고 괴롭힘을 당한다.

에스텔라는 애들을 때려눕혀 결국 자퇴하게 된다. 이후 엄마와 대저택에 들렀다가 달마시안의 공격으로 엄마가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혼자 남은 에스텔라는 또래 소년 재스퍼(조엘 프라이)와 호러스(폴 월터 하우저)와 떠돌이 소매치기 생활을 이어간다.

성인이 된 에스텔라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명품 패션점에 말단 직원으로 취직한다. 하지만 화장실 청소나 쓰레기 분리수거 등 허드렛일을 맡게 된다. 그러던 중 런던 패션계를 쥐고 흔드는 일류 디자이너인 남작부인(에마 톰슨)의 눈에 띄어 대저택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게 된다. 에스텔라는 천부적인 능력으로 단박에 남작부인의 눈에 들며 승승장구하지만, 끝내 남작부인과 대립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패션 디자이너의 성장담이지만, 에스텔라가 남작부인과 갈등을 겪으면서부터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패션 아이콘 크루엘라로 거듭난다. 그리고 발칙하고 비상한 퍼포먼스로 런던 패션계를 뒤집어놓는다. 남작부인이 입맛대로 정해놓은 아름다움의 개념에 도전하기 위한 퍼포먼스도 선보였다.

남작부인이 고상하고 우아한 드레스를 선보이면, 크루엘라는 로큰롤의 길거리 패션을 펼쳐낸다. 남작부인의 최고급 실크 드레스에 맞서 쓰레기 천 조각을 이어붙인 드레스를 뽐낸다. 크루엘라는 런던 패션계의 상징과 같은 남작부인의 적수가 된다. 남작부인은 눈엣가시인 크루엘라를 제거하기 위해 납치, 방화, 살인 등 온갖 범죄를 일삼는다. 못된 성미라면 크루엘라도 만만치 않다.

“안녕 자기? 보여줄게, 내가 누군지. 난 원래부터 뛰어나고, 못됐고, 약간 돌았지.” <크루엘라>를 설명하는 대사다. 영화는 안티 히어로물을 매력적으로 그려낸다. 익숙한 설정을 창의적으로 표현한 덕분이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장점이 훨씬 많다. 크루엘라는 비록 악당이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명성과 재력을 쌓았다. 미우면서도 정감가는 부분이다.

그런 특성을 크루엘라에 온전히 담지 않고 남작부인과 크루엘라에 나눠 재해석했다. 특히 남작부인에게서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년)>의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의 면모와 25년 전 글렌 클로즈의 아우라가 흐른다. 글렌 클로즈가 기획에 참여한 덕분이다. 영화는 엠마 스톤과 엠마 톰슨의 연기와 50~70년대를 풍미한 패션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속도감 있는 연출을 통해 전개가 늘어지지 않는다.

<크루엘라>는 디즈니가 수십 년 동안 쌓아올린 보수적 세계관을 탈피했다. 디즈니 고전들은 왕후장상의 씨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신분제 사회의 모습을 오롯이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타고난 위치에 따라 선과 악으로 나뉘고 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 탓에 흙수저라면 제아무리 노력해봤자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살아가는데 ‘주제 파악’은 노력만큼이나 중요하다. 신분이 분명하게 갈렸던 세상에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던 생각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배운다.

크루엘라도 출생의 비밀이 얽혀있긴 하지만, 패션 아이콘이 된 건 순전히 자신의 노력이다. 더구나 기존의 것을 뒤집는 발칙한 방법을 동원한다. <크루엘라>는 이 시대 관객 눈높이에 맞추려면 변화는 필수라는 것을 보여준다. 디즈니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과거 명작에 새로운 가치를 더했다. 주체적 존재가 된 크루엘라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크루엘라>는 독자적인 영화는 아니다.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의 프리퀄이고, 기존 영화에서 등장인물이나 설정 등을 가져와 새로 이야기를 만들어 낸 스핀오프다. 엠마 스톤이 연기할 완성형 크루엘라가 기대된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