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부패하지 않는 권력이 있을까, ‘헝거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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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게임>은 타임지에서 선정한 ‘2010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된 드라마 작가이자 소설가 수잔 콜린스가 집필한 영어덜트(young adult) SF소설이다. 3부로 완결된 소설은 영화화되면서 4편으로 나눠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개봉했다.

배경은 폐허가 된 미래의 미국이다. 판엠(Panem)으로 불리는 독재국가는 북미대륙에 재앙이 닥친 후 건설됐다. 수도인 캐피톨에는 모든 부(富)가 집중됐고 나머지 13개 구역은 오직 캐피톨의 번영과 풍요를 위해 착취당한다. 13개 구역 중 13구역은 오래전 반란으로 초토화된 바 있다.

캐피톨은 반란에 대한 속죄를 구실로 삼아 74년째 ‘헝거게임’이라는 살육전을 진행하고 있다. 규칙은 매년 12개 구역에서 각각 10대 소년과 소녀 1명씩, 총 24명을 뽑아 서로 죽고 죽여 단 한 사람의 승자가 남도록 하는 것이다. 헝거게임에서 우승하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다. 판엠의 국민은 원치 않아도 24시간 생중계되는 헝거게임을 시청하는 게 의무다. 잔인한 살육전에서 자신의 구역 출신을 응원해야 하는 것이다.

헝거게임의 용도는 공포를 극대화해 언제 벌어질지 모를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참가자를 영웅으로 만들어 적극 선전한다. 잔혹한 경기를 치러야 하지만, 우승을 거머쥐면 부와 명예를 누린다는 보상을 통해 적자생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12개 구역 중 가장 가난한 12구역에 살고 있는 16세 소녀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은 동생을 대신해 헝거게임에 지원한다. 활로 야생동물들을 사냥하며 자란 캣니스는 뛰어난 활 실력을 통해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인다. 그는 결승에서 피타(조시 허처슨)가 과거 아사(餓死)하기 직전 먹을 것을 나눠준 탄광촌 빵집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피타와 연인인 것으로 꾸며 공동 우승을 차지한다.

‘1인 생존’이라는 게임의 법칙을 깨뜨린 캣니스는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대통령 스노우(도널드 서덜랜드)는 캣니스에 힘입은 국민적 저항에 위협을 느낀다. 캣니스가 헝거게임 TV 화면을 통해 억압받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 희망의 불씨를 키우기 때문이다. 스노우는 캣니스를 제거하기 위해 역대 헝거게임 우승자들끼리 맞붙는 새로운 형식의 헝거게임을 주도한다.

그런데 캣니스는 동료를 제쳐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을 거부하고 이런 적자생존의 룰을 만든 억압적 사회를 향해 화살을 날린다. 위기에 처한 캣니스는 혁명군에 의해 구출된다. 혁명의 성지는 판엠에 의해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13구역이다. 혁명의 상징이 된 캣니스는 전 구역 사람을 규합해 캐피톨에 맞선다. 캣니스는 동료들의 희생 속에서 대통령궁 정문 앞에 도착하고, 혁명군은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자신만의 마지막 싸움을 남겨두고 있다.

캣니스가 평범한 소녀에서 혁명의 상징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헝거게임>은 액션보다 정치 드라마적 성향이 짙다. 영웅 캣니스는 캐피톨에서도, 혁명군에서도 ‘장기 말’로 이용된다. 스노우는 판엠의 독재자로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데, 캐피톨 주민의 입장에선 듬직한 보호자다. 혁명군의 지도자 알마 코인(줄리안 무어)은 승리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혁명의 성공을 위해 혁명의 상징인 캣니스를 필요로 하지만, 권력을 쥐기 위해선 캣니스를 죽이려 한다. 혁명군의 수장이 새로운 독재자가 되는 셈이다.

영화의 말미, 캣니스가 처형장에서 스노우를 향해 겨누던 활시위를 돌려 알마 코인을 저격한 것은 꽤 파격적 결말이다. 보통 미디어에서는 전체주의 독재와 이를 타도하려는 혁명은 동화적 결말로 마무리된다. 반군 지도자는 대부분 주인공의 멘토나 자상한 리더, 부패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혁명가로 시작했다가 독재자로 변모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다. 스노우와 알마 코인은 반대 세력일 뿐, 권력을 원한다는 측면에선 별 다를 바가 없다.

<헝거게임>의 결말은 캣니스를 혁명의 상징으로 여기며 지지하는 이들의 기대와 다르다. 음모가 횡행하는 판엠의 세계를 무너뜨린 캣니스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권력과 무관한 삶을 산다. 그리고 영혼의 안식을 비로소 찾는다. 캣니스가 권력을 잡지 않고 재야의 삶으로 돌아간 것에 실망할 수 있다. 두 세력의 독재자 사이에서 성군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이는 캣니스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정점에서 태평성대를 이룰 것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캣니스의 선택은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친 것에 불과하다.

대중이 캣니스가 권력을 잡을 것으로 기대하는 까닭은 부정한 권력을 물리치고 백성의 삶을 진심으로 위하는 성군의 이야기에 너무 익숙한 탓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읽는 위인전과 동화는 모든 난관을 극복한 영웅이 권력의 정점에 서는 것으로 종결된다. 하지만 태평성대가 언제까지 이어진 지에 대해서는 다뤄지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도 권력이 부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최근 <헝거게임> 트릴로지의 스핀오프로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라는 이름의 소설이 나왔다. 스노우 대통령의 과거를 다뤘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 뒤, 폐허가 된 캐피톨에서 유년시절의 스노우는 정의롭다. 가문이 몰락했지만 품위를 지키며 명예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노년의 스노우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정의롭던 스노우는 점점 돌변한다. 권력을 잡으려는 세력들의 암투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던 스노우는 이기기 위해 변해간다.

만약 캣니스가 권력을 쟁취했다면 스노우처럼 타인을 밟고 일어서야 하는 정치의 잔인한 이치를 학습하지 않았을까. 작가가 초야로 돌아간 캣니스를 그린 이유는 캣니스가 권력에 물들어가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 아니었을까.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