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기본이 중요한 이유, ‘레드 노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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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들이 모여 고가의 물건이나 보물을 훔치는 모습과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영화를 하이스트 필름(Heist film) 또는 케이퍼 무비(Caper movie)라고 말한다. 꾀 많은 사기꾼들이 부호의 재산을 털거나, 복수를 위해 범죄자들을 모아 계획을 세우는 게 이들 영화의 전형적인 서사다. 1973년에 개봉한 <스팅>이 대표적이다. 범죄를 모의하고 이를 실행하는 과정을 복잡한 플롯으로 표현하는 영화의 시초다. 범죄자를 낭만적으로 묘사하며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게 특징이다.

<레드 노티스>는 케이퍼 무비의 전형적인 설정과 서사, 전개를 따른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로 대표되는 액션 어드벤쳐까지 섞여 있다. 영화는 도입부에 도둑들이 훔칠 보물에 대해 설명한다. 고대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한 황금알 세 개가 나온다. 황금알을 둘러싸고 희대의 예술품 도둑 놀런 부스(라이언 레이놀즈)와 업계 최고의 도둑 비숍(갤 가돗), 미 연방수사국(FBI) 프로파일러 존 하틀리(드웨인 존슨), 인터폴 우르바시 다스 경위(리투 아리야)가 추격전을 벌인다.

이탈리아 로마의 산탄젤로 박물관. 이곳에 전시 중인 황금알을 부스가 노린다는 첩보를 입수한 하틀리와 다스 경위가 다급하게 이동한다. 전시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부스가 황금알을 훔친 뒤다. 하틀리와 인터폴이 부스를 쫓지만 이내 놓치고 만다. 부스는 이탈리아의 지구 반대편의 한적한 섬에 마련한 집에 도착하는데 하틀리와 인터폴에 체포된다. 황금알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비숍이 그 알을 훔쳐가고 하틀리는 누명을 쓴 채 러시아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곳에서 부스를 만난 하틀리는 누명을 벗기 위해 부스와 손잡고 탈옥을 감행한다. 이후 부스와 팀을 이룬 하틀리는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황금알을 찾아 나선다. 비숍과 경쟁하고 다스 경위의 추격을 피하기도해야 한다.

<레드 노티스>는 넷플릭스 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인 2억 달러(한화 약 2,357억 원)이 소요됐다. 당초 제작비 1억2,500만 달러(한화 약 1,470억 원)를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다. 제작비 30%에 달하는 금액은 주연배우 출연료에 6,000만 달러 이상 들었다. 배우 갯 가돗과 라이언 레이놀즈는 2,000만 달러, 배우 드웨인 존슨에겐 2,000만 달러 이상 지급됐다. 인도네시아 발리, 이탈리아 로마,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전 세계가 배경이지만, 코로나19로 애틀랜타의 세트에서 모두 촬영했다. 세트 제작비만 해도 적지 않은 금액이 든 것으로 보인다. 제작진은 1,000명 이상 동원됐다.

하지만 지난 3일 미국 LA 현지에서 열린 프리미어 시사회에서는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케이퍼 무비의 관습을 무리 없이 따르는 탓에 이야기 전개가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데다, 서로 속고 속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재미도 크지 않다. 반전이 예측 가능한 수준에서 이뤄지는 점도 아쉽다. 놀라운 점도 흥미로운 점도 없어서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배우와 연기, 액션, 유머는 만족스럽지만 그게 전부다.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는 특유의 말재간을 보이고, 배우 드웨인 존슨은 액션에 특화된 연기를 선보인다. 배우 갤 가돗은 매혹적이긴 하지만 그의 필로그래피 중 인상적인 연기나 역할은 아니다.

문제는 각본과 연출에 있다. 배우 섭외와 액션, CG 등 비용이 많이 드는 부문에는 과감하게 투자해도, 정작 영화제작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각본과 연출을 신경쓰지 않으면 영화 완성도를 높이지 못한다. 특히 각본은 영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배우가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도, CG가 눈을 즐겁게 속여도, 액션이 화려해도, 이야기로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설득시키지 못하면 영화인들만의 예술로 그친다. 막대한 예산을 들이고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들이 고생해서 만든 영화가 비판을 받는 것만큼 영화인들에게 끔찍한 일이 있을까.

영화의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배우 드웨인 존슨은 “똑똑한 요즘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게 어려운 일인데, 시나리오에서 놀라움이 있을 때마다 정말 기뻤다”고 각본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영화산업은 막대한 돈이 소요된다. 길게는 수년에서 짧게는 수개월 동안 고생해 만든 영화가 흥행하면 들인 돈의 몇 배가 되는 부를 얻게 되지만, 반대의 경우 빚더미에 앉게 된다. 이 때문에 영화제작자와 투자자들은 흥행 요소를 따져 영화를 제작한다. 개연성보다는 관객들이 좋아할 법한 설정과 전개, 액션, 인기배우 등을 고려한다.

유물을 훔치는 도둑이라는 <레드 노티스>의 설정과 도둑 간의 경쟁, 나치가 숨긴 유물을 찾아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어드벤처적 요소, 쫓고 쫓기는 자동차 추격전은 수십 년간 인기를 끌어왔다. 문제는 이런 요소들이 영화의 서사에 필요해서 넣은 게 아니라 관객의 흥미를 끌기 위해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뭐든 맛보기용으로 스치듯 지나가니, 이도 저도 아닌 잡탕영화에 그친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