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629년 음력 10월, 환곡의 공포

20:55

1629년 음력 10월 26일 안동부, 막 겨울로 들어서고 있었지만, 백성들이 겪는 고초만 보면 엄동설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원래 민성징은 여러 기록에서 포악함을 대변하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경상도 전체가 시끄러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 1629년 가을 민성징의 관심이 환곡 미납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당시 안동의 상황에 대해 “환자還子(환곡)를 거두라는 독촉이 끓는 물이나 뜨거운 불보다 더 급한 것 같다”라고 기록될 정도였을까!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환곡은 백성을 구휼하기 위한 정책이다. 보리를 추수하기 직전인 음력 3월과 4월의 기근은 거의 매년 닥쳐왔고, 이는 세상에서 가장 넘기 어려운 고개인 ‘보릿고개’가 되었다. 가을걷이 이후 보리를 거둘 때까지 백성들의 기근을 면해 주기 위해 3~4월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꾸어주고, 가을 추수에 돌려받았다. 이렇게 돌려쓰는 곡식이라고 해서 환곡還穀 또는 환자라고 불렀다. 당연히 급할 때 빌렸다가 추수 후 납부하니 그에 대해 일정한 이자를 부과하여 환곡 운영이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의도가 좋은 정책은 그 의도를 살려야 하는데, 늘 그렇듯 문제는 실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관아의 몫이니 환곡의 운영도 당연히 관아의 몫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환곡을 저장하는 사창에 곡식을 채워 넣는 것도 관아의 몫이었다. 잘 빌려주고 잘 받아야 했다. 지금과 달리 지방 수령은 행정뿐만 아니라 사법과 치안까지 담당하다 보니, 환곡의 운영에도 공권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백성의 편에 선 지방관과 그렇지 않은 지방관의 환곡 운영에 천양지차가 발생하는 이유였다. 게다가 탐관오리는 이자를 조금만 더 받아도 그것은 그대로 자신의 뒷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대변하듯, 민성징의 처사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마치 모든 미납된 환곡을 한꺼번에 받아 내려는 듯 보였다. 그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공권력을 환곡을 회수하는 데 사용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환곡 미납자들을 죄인 취급해서 잡아들이는 것이었다. 명령을 받은 아전들은 갚아야 할 환곡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환곡 미납자를 잡아들였다. 심지어 한 사람이 연루되면 주위의 가족들까지 그물에 걸듯이 잡아들여서 안동부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안동부 감옥에는 항상 갇혀 있는 사람만 수백 명씩 되었다. 환곡을 내고 풀려나도, 다시 미납자가 그 빈자리를 채운 탓이다.

심지어 백성들의 죄라고 해봐야 환곡 미납에 불과한데도, 민성징은 백성들을 마치 형사사건 범인처럼 목에 칼까지 채웠다. 잡혀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안동부 내에 있는 칼이 모자라 문짝을 뜯어 칼을 만들고 이를 채워 백성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다보니 안 그래도 좁은 감옥에서는 칼이 서로 부딪쳐서 부서질 정도였고,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밤의 고통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낮에는 환곡을 내겠다는 약조를 하거나 혹은 이를 납부할 때까지 곤장을 어지럽게 휘둘러댔다. 사실 곤장은 군현 단위 자방관이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형벌이 아니었다. 워낙 위험한 형벌이기 때문에 지역 관찰사에게 주어진 처벌권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휘둘러 사망자까지 줄을 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당시 예안에 사는 김령은 “안동부 백성들은 발을 모으고 떨면서 숨을 죽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뱀 구덩이 떨어진 것 같다”라고 묘사했다. 결국 환곡을 갚지 못한 사람들은 관아의 폭압을 피해 도망치다 보니 유랑민이 되었다. 그런데 더 악질적인 것은 이렇게 유랑민이 발생하면 그 일족, 심지어 먼 일족이라도 하더라도 그들에게 도망친 사람의 환곡을 전가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모두 납부했다고 해도 미납자 취급을 해서 앞에서 말한 처벌들을 동일하게 했다. 더불어 유랑민에 대해서는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 추적해서 잡아들이도록 했다. 이 공문이 얼마나 남발되었는지, 많은 군현 단위 현감들은 대놓고 말은 못해도 뒤로는 그 가혹함을 성토하곤 했다.

사실 안동에 이렇게 환곡이 밀린 데는 누구나 짐작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환곡도 나라에서 빌린 빚이니 이를 갚지 않고 떼어먹을 간 큰 백성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안동부는 몇 년 동안 흉년이 지속되었고, 가을에 추수해도 환곡을 갚을 여력이 없었다. 가을은 환곡뿐만 아니라 전세를 비롯한 세금 납부 계절이기도 했으니, 지방관 입장에서도 환곡보다는 전세를 거두어 납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안 갚은 것이 아니라 못 갚았던 것이다. 민성징이 가혹한 칼날을 휘둘렀던 1629년도 갚을 수 있는 여력들은 없었다. 그 해라고 풍년이 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심지어 사족 집안까지도 토지나 집, 노비까지 팔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어떤 집은 가산을 모두 정리해도 밀린 환곡을 갚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민성징의 방법은 더욱 가혹해졌고, 백성들 입장에서는 곤장에 맞아 죽느니 가산을 정리해서 내고 굶어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생겼다. 환곡을 받는 과정에서 안동부에는 유민이 급작스럽게 늘었고, 인심도 극도로 사나워졌다. 어떤 백성이 감옥에 끌려가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환곡도 세금으로 운영되니, 이것을 갚은 것 역시 백성들의 의무이다. 나랏돈을 빌려 누구는 갚고 누구는 갚지 않는다면, 조세의 정의 차원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환곡이라는 정책이 무엇을 목적으로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먹고살 것 없는 백성들이 유랑민이 되거나 파산한 채 거리에 나앉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인데, 오히려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백성들은 파산하거나 유랑민이 되었다면, 이 정책은 왜 시행하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납세의 정의만큼 중요한 것이 납세의 목적이라는 의미이다. 백성들을 유랑민으로 만들고 채운 사창의 풍요함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굶고 있는 국민들은 느는데 튼튼한 국가 재정을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