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종말을 앞둔 군상들, 영화 이야기일 뿐일까? ‘돈 룩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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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을 말한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저서 <프레임>을 통해 우리의 착각과 오류, 오만과 편견, 실수와 오해는 프레임에 의해 생겨난다고 말했다. 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새로운 통찰을 일깨우지 못하고 프레임에 갇히는 탓이다. 최 교수는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나와 타인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삶을 창조하는 지혜와 겸손을 장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선 언어와 은유, 가정과 전제, 단어와 질문, 경험과 맥락 등을 점검한 후에 더 나은 것으로 설계하고 시공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6개월 뒤 거대 혜성과 충돌해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궤멸당할 위기에 처한다면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돈 룩 업>은 임박한 재앙을 감지한 과학자들의 경고에도 지지율을 계산하는 정치권과 손익을 따지는 기업, 트래픽을 노리는 미디어, 가십에만 관심을 가지는 대중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다.

미시간대 천문학 박사수료생 케이트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는 태양계에서 궤도를 돌고 있는 낯선 혜성을 발견한다. 하지만 담당 교수 랜들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혜성의 경로를 계산해보니 6개월 14일 뒤 태평양에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혜성의 크기는 6~10㎞에 이른다. 충격은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10억 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충격에 빠진 둘은 대책 마련에 나선다.

지구 멸망의 상황에서 전 세계는 아무 일 없는 듯 유유자적이다. 인류를 구하기 위한 영웅적 희생은 무산되고 모두 제 잇속만 차린다.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사실마저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열한다. 디비아스키와 민디는 오글소프 박사(롭 모건)를 통해 백악관에 연구 결과를 알린다. 어렵게 만난 올린 대통령(메릴 스트립)은 코앞으로 다가온 중간 선거에만 관심을 둔다. 참모들은 미시간대가 명문이 아니라고 깔보며 셋의 말을 건성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디비아스키와 민디는 절박한 마음에 언론의 도움이라도 받기 위해 뉴욕 헤럴드와 인기 방송 프로그램 ‘데일리 립’에도 출연하지만, 언론의 관심은 오로지 시청률이다. 진행자 브리(케이트 블란쳇)는 두 과학자의 경고를 유머 소재로 소비한다. 언론의 태도에 실망한 디비아스키는 분노하는데, 대중은 화난 그의 얼굴을 인터넷 밈으로 만들어 조롱한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인류 절멸의 경고보다 대통령의 스캔들과 스타 커플의 결별 소식에 대중의 관심이 더 집중된다는 점이다.

뒤늦게 하버드 등 명문대 교수들의 확인을 거친 백악관은 혜성의 충돌을 막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는 행성 충돌 위기를 선거 승리의 호재로 삼으려는 작전에 불과하다. 대통령과 참모들이 홀대하던 두 천문학자를 백악관으로 다시 불러들인 건 과학적 데이터 때문이 아니다. 지구적 위기를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혜성 폭파를 위한 로켓 발사식은 대통령의 인기를 얻기 위한 이벤트로 치러진다. 심지어 무인으로 조종할 수 있는 로켓 조종석에 극우 성향의 퇴역 장성을 태운다. 하지만 이 계획마저 인류의 안전보다 혜성에 매장된 광물 확보를 우선으로 보는 대기업 때문에 무산된다.

백악관이 혜성 폭파를 철회한 이유는 혜성의 가치를 ‘우주의 보물 창고’로 보는 대기업 배쉬의 CEO 피터(마크 라이언스)의 말 때문이다. 그는 혜성에 담긴 광물들이 금전적으로 32조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누구도, 어떤 국가도 해결하지 못했던 빈곤과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에 백악관은 대통령의 지지율을 끌어올릴 계획으로 활용한다.

각종 프레젠테이션과 SNS 마케팅으로 유명인사가 된 피터의 설파는 대중을 매혹한다. 그런데 ‘세상을 더 살기 좋게 만드는 천재’로 각인된 피터의 본업은 천문학이나 우주산업과 거리가 멀다.과학적 검증이 안 된 기업의 탐욕과 위기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 지구의 위기조차 사업으로 돌변시키는 자본주의 상술, 정치 생명 유지에 골몰하는 대통령 때문에, 여론은 멸망이냐, 개발이냐로 나뉘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상상에 불과한가, 아니면 실제로 가능한 가설처럼 느껴지는가. 모든 인간 군상을 코미디로 그린 영화 속 점입가경은 후자에 가깝다. 백악관의 과학담당 자문이 마취과 의사라는 점과 여러모로 자격 미달인 대법관 후보를 보고 있으면, 현실의 관료들과 그들의 추천한 이들로 겹쳐 보인다. 정치권이 여야를 막론하고 눈앞의 위기를 타개할 해결책보다는 여론의 관심을 끌만한 궁여지책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현실과 다르지 않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정치인들은 대선을 앞두고 반대 진영에 대한 설득을 포기한 채 지지층만 단단히 결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공약은 표심을 자극하는 선심성 정책에 그친다. 기업은 환경보다는 이익을 우선순위에 두면서도 친환경을 운운한다. 정부의 정책에 마지못해 따라가야 해서다. 이마저도 사업가의 홍보 마케팅에 가려진다.

각국 대기업 수장은 SNS와 미디어 노출을 통해 대중과 가까워진다. 가끔 행사장에 나타나 숨겨진 사생활이라도 알리듯 이웃집 또는 친근한 형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형성된 친근감은 사업의 호감으로 작용하고, 이들의 말 한 마디는 주가를 뒤흔들며,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메시아의 메시지가 된다.

미디어는 정론직필을 내세우면서도 트래픽에 매몰된 행보를 멈추지 않는다. 뉴스 생태계는 클릭수와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벌인다.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들을 흠집 내는 보도들이 쏟아지는 건 이를 방증한다. 대중은 위기의 증거를 애써 외면하고 자극적인 뉴스나 우스꽝스러운 밈에 중독되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연예인의 사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고, 조롱거리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편향된 음모론자의 허황된 말 같은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전염병의 창궐과 지구온난화·기후변화에 따른 기후위기가 눈앞에 닥쳐오는데도 우리는 위기에 무관심하다. 이웃이, 동료가 전염병에 걸려 죽어나가도 그들이 방역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을 탓하고, 여가를 즐기지 못하는 것을 불평한다. 그러는 사이 재앙은 우리 앞에 다가서고 있다. ‘돈 룩 업(Don’t Look Up)’은 글자 그대로 올려다보지 말라는 뜻인데, 영화 맥락에서는 ‘나와 다른 의견은 믿지마’ 또는 ‘신경 쓰지마’로도 해석할 수 있다. 멸망을 피하려면 영웅이나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라, 프레임을 깨는 게 우선이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