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철 지난 첩보물이 아직 유행하는 이유, ‘아메리칸 울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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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특수요원, 기억을 잃은 인간 살상병기, 이들을 만드는 프로그램, 이를 둘러싼 음모와 조직의 이해관계. 첩보물의 지독한 클리셰다. 배우 덴젤 워싱턴과 리암 니슨은 쉰 살 넘어 전직 특수요원 역을 맡아 액션 연기를 펼쳤다. 두 배우의 둔하고 느린 동작을 편집과 샷 구성, 명암으로 가리거나 덮었다. 배우 멧 데이먼은 미국 CIA의 최정예 암살요원 제이슨 본을 연기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오랜 경험으로 체득한 실력을 발휘해 위기를 넘기고 CIA를 압박했다.

배우 톰 크루즈와 빈 디젤, 제이슨 스타뎀을 비롯해 수많은 배우들이 등장한 첩보 장르물에 클리셰는 빠지지 않았다.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는 특수요원은 왜 이렇게 많고, 홀로 조직을 괴멸할 정도의 기량을 갖춘 기억상실증 암살요원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CIA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인간 살상병기를 육성해놓고 그들을 제거하려는 걸까. 과연 이들끼리 대결을 하면 누가 으뜸일지 궁금할 정도다.

이렇게 쏟아지는 첩보물 가운데 <아메리칸 울트라(2015년)>는 독특하다. CIA의 일급 기밀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최정예 요원 마이크 역을 액션과 거리가 먼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가 맡았기 때문이다. 마이크의 연인 피비 역은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했다. 둘은 강인하고 섹시한 첩보요원과 동떨어져 있다. 하지만 기존 장르물과 차별성을 두는 게 아니라 B급 영화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끌어모았다.

서사는 엉성하고 전개가 매끄럽지 않다. 먼저 CIA 팀장 아드리안 예이츠(토퍼 그레이스)가 왜 마이크를 제거하려는 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사무직원이던 그는 갑자기 팀장으로 승진하고 대책 없이 판을 벌인다. CIA 전 팀장 빅토리아 라세터(코니 브리튼)는 왜 좌천돼서 예이츠의 계획에 맞서 위험을 무릎 쓰고 마이크를 보호하려는지 나오지 않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마이크 제거 계획을 추진하는 CIA는 마이크가 살고 있는 마을을 폐쇄하고 쑥대밭으로 만든다.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주연인 마이크다. 인간 살상병기 육성 프로젝트(울트라)가 왜 실패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마이크가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조차 나오지 않는다. 굳이 시간을 들여 과거 장면을 회상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설명은 해야 한다. 그런데 영화는 관객이 짐작만 하게 만든다.

또 다른 단점은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가 어설픈 동작으로 적들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 짧은 격투 장면은 그럭저럭 넘어가지만, 영화 후반부 마트 격투 장면에서는 비실대는 아이젠버그의 움직임이 그대로 노출된다.

연약하고 심약한 시골 청년이 알고 보니 인간 살상병기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이해시키려면 적어도 민첩하거나, 절도 있는 동작을 보여줘야 한다. 아니면 그의 몸에서는 고된 훈련으로 인한 근육이나 실전을 겪어 생긴 흉터라도 눈여겨보게끔 해야 한다. 그것도 아니면 눈빛이나 발성 톤의 변화라도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젠버그의 눈빛과 행동은 <좀비랜드(2009년)>의 콜럼버스와 흡사하다. 아이젠버그는 발군의 대사 능력을 앞세운 지능형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왔다. 이는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도 마찬가지다. 그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벨라 스완을 연기하는 것 같다.

이런 탓에 영화의 흐름이 깔끔하지 않고, 첩보 프로젝트가 어설프며 뻔한 결말을 비롯한 이야기 전체에 있는 빈틈이 두드러진다. 영화에서 경력을 포기하고 남자친구 곁에 머무르는 여자친구, 세뇌된 인격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 그리고 붙잡힌 여자친구를 구해내고 프로포즈를 하는 멜로에 주안점을 뒀다고 해도, 느닷없는 감정신이나 장면 간 어색한 연결고리는 몰입을 방해한다.

클리셰로 가득한 엉터리 첩보물은 앞으로도 쏟아질 것이다. 아직도 허황된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첩보물은 미소 냉전 시기의 산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물간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에도 여전히 첩보물은 끊이지 않는다. 물론 과거 정부에서 벌인 정치 공작이 음모론을 맹신하는데 한몫한다.

<아메리칸 울트라>의 경우 1960년대 미국 중앙 정보국(CIA) 등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시도한 불법 세뇌 실험 MK 울트라 프로젝트(Project MK-ULTRA)이 바탕이다. 당시 미국 CIA가 인간의 정신을 조종해 사람을 맘대로 움직이는 실험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영화나 소설에 나올법한 음모론이었지만, 1974년 뉴욕 타임스에 의해 단순 유언비어가 아니라는 사실이 폭로됐다. 이듬해 미 의회를 통해 세뇌 실험의 실체가 확인됐다.

MK 울트라 프로젝트는 가짓수만 54개에 달하고, 마약류를 비롯해 전기, 빛, 음향, 방사능, 화학, 약학, 생물학에 내외과 수술을 포함한 광범위한 기술이 동원됐다. 미 정부의 반인륜적인 실험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CIA가 모든 파일을 폐기한 탓에 상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정확한 내막이 밝혀지지 않자, MK 울트라를 소재로 한 2차적 음모론이 수없이 만들어졌다.

집권세력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삼은 수많은 공작은 감춰지지 않았다. 그토록 은폐하려 했던 진실은 수면 위로 떠올랐고, 국민들의 불신을 초래했다. 철 지난 첩보물이 아직도 유행하는 이유는 어쩌면 더러운 공작으로 인해 신뢰가 깨진 탓이 아닐까.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