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796년 음력 2월 17일, 권력은 늘 법을 넘어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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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성 입장에서는 지방관이 누군가에 따라 삶이 달라지듯, 지방관 입장에서도 어디로 발령받는가에 따라 업무 난이도가 달랐다. 특히, 문관에 비해 차별받는 무관 입장에서 이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관이 지방관으로 배치되어야 할 이유에는 종종 국경 방어나 왜구 침탈 등과 같은 논리가 들어 있었고, 그러다보니 오지에 발령받기 일쑤였다. 도성과 멀었고, 재력이 튼튼한 고을도 아니었다. 게다가 대부분 국경을 맞대고 있다 보니, 언제 외적이 발호할지 알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도 존재하는 지역이었다. 구미가 고향인 무관 노상추가 근무했던 갑산이나 삭주 역시 그러한 곳이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 인심은 도성을 비롯한 큰 고을 인심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오지의 특성상 지방관 권력이 절대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지역 토호의 권력 역시 절대적이기도 했다. 파견된 권력의 힘이 포악할수록 지역 세력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지역을 소외시키는 국가에 대한 불만은 그들 삶의 기반이 되었고, 국경너머 오랑캐로부터 침략당할 수 있다는 인식은 늘 무력대응이 가능한 수준의 대비 속에 살게 했다. 이러한 오지 사람들에게 중앙에서 내려오는 지방관이 좋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노상추가 보기에 안 그래도 불씨만 있으면 관아라도 뒤엎을 자세로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을 더욱 팍팍하게 만든 건 도성에서 내려간 관리들이었다.

변방 중에 변방인 갑산과 삭주 수령으로 근무하면서 노상추는 팍팍하기 이를 데 없는 오지 인심을 몸으로 겪었다. 국가에 대한 불만과 침략에 대한 긴장감은 때때로 국가를 대리하는 지방관과의 대치로 이어질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된 데에는 국가를 대리해서 파견된 지방관의 책임이 컸다. 국가를 대리하는 그들은 적어도 국가의 입장에서 힘든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국가가 그들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공유해야 했다. 그러나 노상추가 본 대부분의 변방 지역 지방관들은 법을 우습게 여기기 일쑤였다. 지방에 발령을 받은 이들은 관찰사나 수령이 되어도 법을 따르지 않는 관행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 지방관으로만 내려가면 왕을 대리한다는 명분으로, 그들 스스로 법 위에 섰다. 특히 이러한 행태는 법을 지키려는 지방관까지 괴롭힘으로써, 그들의 관행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켰다.

그러다보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까지 연출되었다. 노상추는 이 기록을 남기기 이틀 전인 1796년 음력 2월 15일 병마절도사 이동식李東植의 행태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선대 왕이나 왕비의 제삿날인 국기일國忌日은 유학의 기본 이념인 효孝를 충忠으로 연결하는 중요 고리였다. 마치 자신의 조상 제사를 지내듯 국가의 제사를 섬기는 것은 관리된 사람이 당연히 지켜야 하는 법이었다. 적어도 제사 지내기 3일 전부터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하는 치재致齋의 법도 역시 지켜야 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강상윤리를 기반으로 하는 조선시대에는 법이 그랬다.

그러나 병마절도사 이동식은 15일 밤에 큰 잔치를 열었다. 악사들과 기생들까지 동반된 잔치였다. 풍악 소리가 닭이 울고야 그쳤다고 하니, 얼마나 흥겨운 잔치였는지는 짐작 가능하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시점이었으니, 그들의 흥겨움은 배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노상추가 선전관으로 있을 때 당시 별군직에 있었던 이윤빈의 아버지 이방일은 국상 기간에 집을 넓히는 공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탄핵되었을 정도이니, 법이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잔치는 당연히 탄핵의 대상이었고, 심하면 강상을 범한 죄로 엄하게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아마 잔치를 연 이동식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탄핵 당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던 듯했고, 실제 아무도 그를 탄핵하지 못했다. 당연히 처벌도 없었다. 기생의 웃음소리와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왕의 제사를 비웃는 듯 했고, 이날 국기일을 지키기 위해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던 관원들만 바보가 되었다.

이러한 일은 고위직으로 갈수록 더했다.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사복시司僕寺(궁중의 말이나 가마 등을 관리하던 하급 관아)에서는 어떤 사고가 있었던 듯했다. 사복시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제조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까지 문제 될 정도였으니, 사안은 작지 않았던 듯하다. 홍낙성은 여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올렸고, 정조는 홍낙성에게 건강이나 보살피라는 권고로 가름했다. 일반적인 예에 따르면 홍낙성은 몇 번에 걸쳐 사직서를 올려야 했고(보통 삼순이라고 해서, 10일 간격으로 세 번 사직서를 올리는 게 예였다), 임금의 최종 판단은 그때 가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홍낙성은 정조의 권유를 받자마자 사직서를 거두어들이고는 다시는 사직을 아뢰지 않았다. 애초부터 사직할 의사가 없었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하면, 처음부터 그는 사복시 문제에 대해 책임질 생각이 없었다.

노상추가 가슴을 쳤던 이유이다. 법은 조문만 있다고 법이 아니고, 불법이 있을 때 그에 따른 법적 조치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법적 조치가 권력의 상하와 관계없이 동일하게 적용될 때 이를 법치국가라고 한다. 그러나 노상추가 보기에 서울 출신자와 세력이 큰 자들은 아무리 큰 불법을 행해도 늘 미꾸라지처럼 처벌을 피해갔다. 영의정부터 법을 어기고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니, 병마절도사는 대 놓고 국기일에 기생을 불러 잔치를 열었다. 만약 이들에게 권력이 없었다면, 조선시대 상황에서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권력 없는 별군직 장수는 집고치는 공사 좀 했다가 탄핵 당했지만, 권력을 가진 이들은 국기일에 강상을 어겨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안 그래도 국경을 맞대고 황폐한 땅을 일구며 척박한 삶을 사는 오지 백성들에게 이것이 어떻게 보일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법은 권력 아래 존재하고, 당장 하루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 하는 백성들 집 옆에서는 불법적인 잔치로 밤을 새니, 그들의 인심이 팍팍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었다. 법은 그 존재보다, 그것이 어디까지 공평하게 적용되는지가 훨씬 중요한 이유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