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규 칼럼] ‘시한폭탄 소동’이 남긴 교훈과 깨달음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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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에서 폭탄이 터질 수 있습니다. 지금 즉시 월롱초등학교로 대피하십시오.” 2000년 1월 4일 한밤중에 파주시 월롱면 영태1리 이장이 마을 방송 스피커로 다급하게 알렸다. 이때부터 마을은 날이 밝을 때까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당시 필자는 파주 지역을 지키는 백마사단 참모로서 그날 밤을 주민들과 함께 꼬박 뜬 눈으로 새웠다. 지금도 긴박했던 순간이 생생하다. 요즘 러시아의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접할 때마다 그때가 떠오른다. 주민들은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순간에도 자신의 안위보다 가족을 챙겼다. 가족은 그 어떠한 공포도 이겨 내는 존재임을 주민들이 보여주었다.

▲지금은 반환 후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캠프 애드워즈. [사진=딜라이브 뉴스 유튜브 영상 갈무리]

22년 전 1월 4일 오후 7시경, 한미연합사령부가 백마사단 상황실로 ‘파주 미군 에드워드 캠프에 시한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첩보를 전하며 내용도 대략 알려 주었다. “전역한 주한미군(씨 볼트, Sea Balt) 용사가 마약사범으로 조사받던 중, 동료인 파키스탄계 용사가 ‘이 기지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진술한 것이다.

미 FBI는 바로 주한미군사령부에 통보했고, 우리 군에도 상황이 접수되었다. 한·미군은 불확실한 첩보이지만 과감하게 선제적인 조치를 취했다. 미 에드워드 캠프(공병대대)는 기지에서 4km 북쪽 자이언트 캠프로 탄약과 유류를 옮기고, 옆에 있는 사단의 예하부대도 관련 물자를 안전지역으로 옮기도록 했다. 한·미군은 만약 시한폭탄이 터지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부대에 보유 중인 폭발물을 안전한 곳에 우선 옮기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두고 지금까지도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미군과 우리 군이 주민들을 두고 먼저 대피했다’고 오해하고 있다.

필자는 현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군사경찰대장과 함께 현장으로 차를 몰았다. 밤 10시경 해부대에 도착하니 미군기지와 사단 예하대대는 폭발물을 거의 다 옮기고 있었다. 파주시청에서도 미군기지가 넓지만 폭탄의 위력을 알 수 없기에 소방차 대기, 도로통제 등 사전 조치를 취했다. 인근 주민들까지도 완전 대피시키기로 결정했다.

영태1리 이장은 “주민 여러분! 미군기지에서 폭발물이 터질 수 있습니다. 지금 속히 월롱초등학교로 대피하십시오”라고 방송으로 알렸다. 깊은 잠에 빠진 사람들은 못 들었는지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주민들을 대피시키고자 집집마다 방문을 했다.

필자는 ‘미군 용사가 설마 시한폭탄을 설치했을까?’ 아니길 바라다가 덜컹 겁이 났다. 지금 폭발하면 어떻게 되지? 여기 주민들은 다 죽는다는 것인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확 돋았다. 폭탄의 위력은?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너무 두려웠다.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갓 돌 지난 아들과 유치원생 딸과 아내 그리고 부모님이 스쳐 지나갔다.

말이 없는 헌병대장에게 “태권도 6단이라도 폭탄은 피할 수 없습니다”고 하자, 군사경찰대장은 “사나이 태어나서 한번 죽지 두 번 죽나”라며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전우이자 큰 형님 같은 가족이었다. 용기를 내어 더 열심히 이것저것 확인할 수 있었다.

가두방송 소리와 주민들이 가족과 이웃을 찾는 소리가 뒤섞여 이미 폭탄이 터진 상황 같았다. 어떤 가정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거동이 불편하다’며 ‘온 가족이 함께 집에 있겠다’고 한다. 어떤 부모는 ‘아들이 공장에서 돌아오고 있다’고 ‘조금만 더 기다리겠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공무원들과 함께 연로하신 어른들의 거동을 도왔다.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순간에 이웃까지 돌보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영태1리 사람들은 인근 월롱초등학교에 5일 새벽 3시가 되어서야 140여 명 모두 대피했다. 영태2∼5리 사람들은 또 다른 안전한 곳에 대피했다. 이른 새벽에 달려 온 대한적십자 경기지사는 따뜻한 차로 추운 날씨를 녹이니 공포와 긴장감은 사라지고 서로서로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날이 완전히 밝자, “미 FBI에서 조사 결과 ‘허위 사실’로 밝혀졌다”고 사단에서 연락이 왔다. 밤새 긴장된 순간이 ‘해프닝’으로 끝났다.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한밤중에 대피시킨 공무원들에게 항의대신 ‘수고했다’는 덕담을 건넸다.

반면에 미군과 우리 군부대가 먼저 대피한 것에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필자는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부대 내 폭발물을 안전한 곳으로 미리 옮겼습니다. 대피가 아니라 군사작전을 했습니다. 사전에 알려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하게 말씀을 드렸다. 주민들은 호통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주민들도 공무원도 군인도 모두 한 가족처럼 여겼기에 용서한 것 같다. 한미 군부대는 주민들의 안전을 가족의 안전처럼 여기고 열심히 뛰었지만 소통이 없었다. 이 교훈을 지금도 되새기고 있다.

시한폭탄 소동현장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가족이 함께하면 그 어떤 어려움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 가족은 그 어떤 것보다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이자, 우리 사회의 뿌리이다. 가족이 흔들리면 사회가 흔들리고. 국가도 흔들린다. 가족이 탄탄하면 사회도 탄탄하고 국가도 탄탄할 것이다. 가족!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포근해진다. 코로나19로 어려운 형제와 이웃에 먼저 찾아가야겠다. 가족의 이름으로.

전병규 kyu9664@naver.com
육군에서 33년 복무하고 2021년 예편했다. 소말리아, 이라크에서도 근무했다. 전역 직전에는 대구, 경북을 지키는 강철사단의 부사단장을 역임했다. 대구과학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