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796년, 세입자 노상추의 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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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남인으로 그 어려운 무과와 선천宣薦(선전관 천거를 미리 받는 제도로, 무과 합격자에게는 고위 관료로 진출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었다)을 통과하여, 무관으로는 좀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지방관(정3품의 삭주부사)까지 역임했던 노상추였다. 하지만 1796년 음력 4월 말, 그는 서울에서 집 가진 생원 하나 이기지 못해 욕까지 한가득 담은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상추도 이길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집주인’이었다.

지방 출신에게 과거 합격은 특히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지방 출신을 기다리는 일 가운데 하나는 녹록치 않은 한양 생활이었다. 지방관은 관아라도 주어지지만, 한양 생활을 위해서는 스스로 거주할 곳을 마련해야 했다. 한양은 조선 정치의 중심이었고, 그러다보니 당연히 말단부터 고위관료까지 많은 지역 출신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서울은 집에 대한 수요가 결코 낮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굳이 집을 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고위직이라도 관직 생활 후 고향으로의 복귀가 너무 당연한 조선에서 굳이 지방 물가의 몇 배가 넘는 서울의 집을 마련할 필요도 없었다. 세 들어 사는 게 편한 이유였다.

수요가 많으면, 욕심 많은 공급자가 늘어나는 것 역시 인지상정이다. 서울 인심 각박한 거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고, 집주인 생원 허림許霖은 그러한 욕심 많은 서울 집주인을 대표했다. 허생원은 노상추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지인의 친척이었다. 아마 노상추 스스로 허생원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았다면 애초 그의 집에 세 들 생각도 안했을 터였고,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 당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지인의 입장에서도 세를 구하는 게 쉽지 않은 서울 사정을 잘 안 탓에 주위에 세를 놓는 친척을 소개해 준 것이었지만, 노상추 입장에서는 이마 저만 큰 타격을 받은 게 아니었다.

노상추가 세 든 집은 허생원의 집에서 별도로 떨어진 사랑채였다. 가격은 27냥이라 해서 이것저것 잴 것 없이 계약 했고, 이사까지 마친 게 겨우 한 달 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허생원이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했다. 아무리 부동산 계약법이 없던 시기의 이야기라지만 한 달은 너무한 처사였다. 상황을 알고 보니 한 달 새 허 생원은 또 다른 세입자를 구했다. 당시 승지였던 허질許晊이 집을 구하고 있었고, 허 생원은 노상추가 사는 집을 40냥에 세 주기로 했다. 13냥의 차익에다 같은 정3품 당상관이라 해도 문관인 승지를 자기 집에 들인다는 생각에 허 생원은 노상추의 존재마저 잊었다. 당당하게 집을 비워달라 요구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노상추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제 노상추는 낸 돈이라도 돌려받아야 할 판이었다. 27냥 전액을 돌려주지 않으면 집을 비우지 않겠다는 소심한 엄포가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데 허생원은 다른 곳에 돈을 사용할 일이 있었던지 허질에게 받은 40냥을 이미 다 써 버려, 노상추에게 내줄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돈도 못 받고 거리에 나 앉을 수는 없는 상황이라 노상추는 돈 없이 나가지는 않겠다고 버텼고, 결국 허 생원은 허질에게 다른 방을 주었다. 그러나 역시 약삭빠른 허 생원은 이 와중에도 노상추에게 3냥을 더 올려 주어야 그 방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 한 달 만에 집세를 10%나 더 올린 건데, 그래도 이사 한 달 만에 다시 이사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그러나 허 생원의 횡포는 이제 시작이었다. 허 생원은 얼마 뒤 다시 노상추를 찾아와 “며칠 전 사당 안에 있는 사랑에 온돌을 놓았으니 허질 승지와 방을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허질 입장에서도 40냥을 내고도 원래 들기로 한 방을 못 받았으니, 아마 허 생원을 강하게 압박했던 듯하다. 결국 허 생원은 사당 안에 있는 작은 사랑채에 온돌을 놓아 노상추를 그리 옮기고 허질에게 원래 주기로 했던 집을 주려 했다. 그러나 노상추는 더 이상 허 생원의 욕심을 참기 어려웠다. 차라리 이사를 할지언정 방을 바꿀 수 없다고 버텼고, 결국 허 생원은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노상추로서는 셋돈으로 낸 30냥이나 제대로 받아 나가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사할 새집을 알아보면서, 노상추는 30냥 전액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허 생원은 이제 줄 돈을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예 10냥 밖에 없다면서 이 돈이라도 받아 나갈테면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방을 바꾸라고 강요했다. 이쯤 되자 노상추의 인내도 바닥났다. “사람 대하는 일을 아이들 놀이같이 하는 거요?”라고 번역될 정도의 점잖은 말로 기록되어 있지만, 무관으로 수십 년을 지낸 노상추의 노기를 허 생원을 공포에 밀어 넣었을 터였다. 그제야 허 생원은 벌벌 떨면서 노상추에게 사과하고 사당 안에 새로 온돌을 깐 방을 좌랑 정언인鄭彦仁에게 세 주고 그 돈을 받아 노상추에게 30냥을 돌려주었다. 애초에 점잖게 대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돈을 돌려받고 나니 허 생원은 노상추를 하루라도 빨리 내보내기 위해 가솔들을 위협하고 구박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관이라지만 당상관이었던 노상추에게 허 생원 자신이 직접 그리할 수 없으니, 그 방에서 차지할 허질의 종을 시켰다. 다행히 노상추는 주동鑄洞의 송宋 생원이 가진 산의 정자를 빌려서 이사를 했고, 한 달여 세입자로서의 마음고생을 끝내기는 했다. 그제야 사당 안에 새로 온돌을 깐 방에 속아서 들어온 좌랑 정언인이 불쌍했고, 승지 벼슬을 가지고 허 생원에게 이용당하는 허질도 상종할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허 생원은 집주인이 부릴 수 있는 갑질의 종합 선물 세트 같다. 실제 허 생원이라는 이름만 빼면 이 기록의 연도를 1970~80년 때쯤으로 바꾸어도 어느 하나 이상할 게 없다. 자기 마음대로 집값을 올리고, 돈을 더 받기 위해 기존 세입자를 쫓아내며, 없는 방도 만들어 파는 모습까지, 어느 하나 현대와 다를 게 없다. 집이 주거 공간을 넘어, 공급의 불균형에 따른 돈벌이 수단이 되면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서 집은 주거 공간이 아닌, 경제라는 욕망에 저당 잡힌 재화로 전락했다. 허 생원에게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