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과거의 영광에 기대지 않는 ‘탑건: 매버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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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長年)의 미국 해군 조종사 피트 미첼(톰 크루즈), 콜사인 매버릭은 전투기를 몰고 하늘을 누빈다. 동기들은 함대를 지휘하는 제독이 됐는데 그는 여전히 대령 계급에 머문다. 매버릭에는 고집불통의 개성파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매버릭은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초음속 스텔스기 ‘다크 스타’의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다크 스타는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다. 이유는 새로운 사령관 케인(에드 해리스)이 무인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매버릭은 케인이 도착하기 직전에 다크 스타를 타고 하늘에 날아올라 목표인 마하 10을 성공시킨다. 하지만 독단적으로 목표치 이상을 노리다가 추락한다.

돌발 행동을 벌인 매버릭은 최정예 조종사들을 양성하는 탑건 학교의 교관으로 전출된다. 처벌받을 게 당연하지만, 탑건의 동기이자 해군의 제독 콜사인 아이스맨, 톰 카잔스키(발 킬머)의 도움 덕분이다. 케인은 매버릭에게 말한다. “파일럿이 전투기를 모는 시대는 끝났어.” 매버릭은 이렇게 대답한다. “언젠가는 그럴지 모르죠. 그러나 오늘은 아닙니다.”

탑건으로 복귀한 매버릭은 젊은 시절의 추억을 회상한다. 하지만 해군 수뇌부는 매버릭에게 3주 후 중동의 우라늄 농축 시설을 한물간 전투기 F-18로 파괴하는 파일럿을 교육, 선발하라는 임무를 내린다. 그런데 매버릭은 후보생 중에 과거 훈련 도중 사고로 숨진 동료 구스의 아들 루스터(마일즈 텔러)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임무는 무사 귀환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첩첩산중에 자리 잡은 핵시설은 지대공 미사일의 호위를 받고 있어 이를 뚫고 정밀타격을 하려면 위험한 저공비행과 초음속의 중력을 견뎌내야 한다. 게다가 지대공 미사일을 피하고 적국의 5세대 전투기와의 교전을 감수해야 한다. 해군 수뇌부는 아군 희생을 감수하려고 한다.

또 다른 문제는 팀웍이다. 후보생들은 자만심에 휩싸여 전혀 화합하지 않고 매버릭을 한물간 파일럿 취급한다. 루스터는 해군사관학교 입교를 4년간 반려한 탓에 자신을 원망하며 매번 대립한다. 매버릭은 아군 희생을 감수하려는 해군 수뇌부에 맞서 전원 무사 귀환을 목표로 무리한 훈련을 거듭한다.

“30년 넘는 군 복무, 참전 메달, 무공 훈장들. 지난 40년 동안 3대의 적기를 격추시킨 유일한 조종사. 그러나 자네는 진급도 못 하고, 전역도 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지만 사라지기를 거부했네. 매버릭, 자네는 지금쯤은 적어도 별 두 개를 달았어야 해. 그런데 뭔가, 겨우 대령이라니. 이유가 뭔가?”

매버릭은 미 해군의 전설적인 현역 파일럿이다. 그가 순탄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사고로 전우를 잃고, 과욕으로 일을 그르쳤다. 출세를 거부하고 결혼도 않은 채 비행한다. 내일은 없는 것처럼 여전히 명령에 굴복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중력을 거스르는 속도를 즐긴다. 그런 그가 책임의 무게를 짊어진다. 팀웍을 위해 양보하고 사랑하는 페니(제니퍼 코넬리)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케인의 말처럼 아무리 뛰어나도 지시를 거스르는 파일럿보다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드론이 필요한 시대다. 과거의 영웅이 설 자리는 사라지고 있다. 다크 스타로 마하 10에 도달한 매버릭이 전설이 건재하다는 것을 상징한다면, 과욕으로 마하 10을 넘어서며 전투기가 고장을 내며 추락하는 장면은 과거의 유산이 있을 자리는 없다는 점을 뜻하는 것 같다.

전설도 시대와 세대를 거스를 수는 없다. 왕년의 명성을 직접 본 적 없는 청춘들에게는 과거의 영광에 취한 기성세대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새로운 세대의 신뢰를 얻기 위해 매버릭이 택한 건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는 본인이 설계한 고난도 코스를 직접 비행한다. 여전히 압도적인 조종 실력과 유효한 전술 역량을 증명하는 것이다. 적군의 신형 전투기와 지대공 미사일로부터 무차별 공격에 노출될 때는 목숨 걸고 앞장선다. 파일럿의 역할과 소명이 무엇인지 후배 세대에게 몸소 보여준 것이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선 실천해야 한다.

현역이라면 누구나 물러나야 할 때가 있다. 그게 오늘이 아니기 위해선 자신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억지로 알려주기보다는 ‘지위와 경험에 맞는 역할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배우 톰 크루즈는 예순 살이 넘은 나이에 F-18 전투기에 탑승했다. 그를 비롯한 배우들은 몸무게의 9배에 달하는 중력을 버티는 고강도 훈련을 받았다. 전편 촬영 이후 전투기 등 각종 항공기 조종 기술을 익히고 조종사 자격증까지 딴 크루즈는 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와 함께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후배 배우들의 훈련을 이끌었다. 배우 마일즈 텔러는 “크루즈는 후배들의 연기를 정말 잘 이끌어줬다. 그가 이 영화에서 모두가 함께 승리하기를 원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 덕분에 내 능력 이상의 것들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도 배우처럼 전편의 영광에 묻어가지 않는다. 36년 숙성된 추억을 팔아 돈벌이만 하려 하지 않고, 새로운 이들과 이야기를 풀어간다. 냉전이라는 낡은 시대적 상황에서 벗어나, 동료 간의 갈등과 통제에 따라주기를 바라는 윗선과 대립한다. 영화에선 적의 얼굴조차 나오지 않는다.

영화는 영리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망망대해 항공모함에서 전투기의 이착륙과 하늘을 나는 전투기와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오토바이 등 전편의 명장면을 자연스럽게 오마주했다. 전개도 마찬가지다. 탑건 학교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매버릭이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깊이 좌절하지만, 끝내 극복하고 임무를 완수한다. 전편의 구조, 장면, 상황이 되풀이되지만, 거부감이 들 정도로 흔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