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중대재해처벌법 첫 기소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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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시행 5개월 만에 검찰의 첫 기소가 이뤄졌다. 지난달 27일 창원지검은 지역의 한 에어컨 부품 제조업체 대표를 기소했다고 밝혔다. 이곳에서는 제품 공정 중 세척제 성분인 트리클로로메탄에 의한 급성중독자 16명이 발생했다. 검찰은 업체가 화학물질을 취급하면서도 국소 배기장치가 없는 등 안전보건관리체계를 마련하지 않았다고 했다.

반면 같은 세척제를 쓰는 김해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에서 13명의 급성중독자가 발생했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업체는 종사자의 의견청취와 유해·위험 요인 확인·개선 절차를 마련하고, 재해예방 필요 예산을 편성하는 등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구축한 사실이 인정됐다.

다만 작업장에 성능이 저하된 국소 배기장치를 방치한 잘못으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국소 배기장치가 제 역할을 못했지만 노력을 했다고 생각해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피한 것이다. 배기장치를 방치하고, 방치된 배기장치는 역할을 못해서 13명의 급성중독자가 발생했지만 말이다.

민주노총은 대구·경북을 비롯해 광주, 전남, 세종, 충남 등에서 지역 검찰청을 찾아가 전국동시다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삼표산업 등 중대재해 사업장 최고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면서, “법이 시행되고 5개월이 지났지만 제대로 기소나 구속 수사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노조는 ‘중대재해법 적용 1호’ 사건인 삼표산업이 여전히 기소되지 않는 상황을 사례로 지적했다. 법 시행 이후 발생한 중대재해 240여 건 중 법 적용 대상은 ⅓ 수준인 80여 건에 그친다고도 했다. 이처럼 중대재해가 모두 법 적용 대상에 해당하지 않고, 수사 속도도 더디다. 법이 제 역할을 하기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 민주노총 대구·경북본부는 지난 29일 대구지방검창철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표산업 등 중대재해 사업장 최고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범위는 제한적이다. 중대재해는 산업재해로 사망자가 1명 이상 또는 동일한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발생할 경우 또는 동일한 유해요인의 직업성 질병자가 1년 이내 3명 이상 발생하는 경우로 정의된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더라도 50인 이상 사업장이거나, 건설업은 공사금액 50억 원 이상 작업장이어야 법이 적용된다.

5~49인 사업장이거나 공사금액 50억 미만의 경우에는 2024년부터 적용되고, 5인 미만 사업장은 해당되지 않는다. 법 시행 후 발생한 대구와 경북의 중대재해는 26건인데, 이 조건에 따르면 적용 검토 대상은 8건(30.8%)이다. 지난해 전국 산재 사망자 828명 중 약 80%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다.

이렇듯 실제 법 적용 대상이 되어야 할 기업 다수가 법 적용의 사각지대에 있고, 적용 요건도 까다로운 상황이다. 첫 기소 사례는 법 적용을 피할 수 있는 ‘힌트’를 제시한 꼴이 됐다. 대기업과 공공기관은 형식적이라도 안전관리보건체계를 갖췄을 것이고, 중소기업도 이번에 그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수많은 산재 사망자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다. 2016년 ‘구의역 김군’과 2018년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산재사망한 故김용균(당시 24세) 씨가 있었다. 잊을만하면 나오는 비슷한 사고들에 ‘출근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막아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이 법을 만드는데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법 적용은 여전히 사각지대가 많고, 법 적용마저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이달 초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법 수사, 어떤 기준으로 하고 있나’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여기서 노동부 정책관은 “수사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결국 예방에 있다”고 말했다. 이번 창원에서 발생한 노동자 30명이 세척제에 급성중독 증상을 보인 사건도 그렇다. ‘제대로 작동하는’ 국소 배기장치가 설치됐어야 최소한 ‘예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국소 배기장치가 있었고,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산업 현장도, 사법부도 법 취지를 잊고 있다.

장은미 기자
jem@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