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패배의 자술서, 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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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삼전도에서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박아가면서 패배를 인정했던 병자호란은 대부분 조선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게다가 이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지속적인 패배감과 굴욕감 속에서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 가는 원인이기도 했다. 청은 전쟁 승리 이후 사대를 받는 국가로서의 권한을 충분히 행사했고, 조선은 그들의 권한 행사 과정에서 나오는 요구 어느 하나도 쉽지 않았다. 그 가운데 특히 전쟁이 끝난 지 약 2여 년 지난 1639년 음력 6월 청나라 칙사들의 요구는 참으로 어렵기만 했다.

음력 6월 25일에 모화관에 도착한 청나라 사신 관련 소문은 한양에서 한참 떨어진 예안 고을 선비들의 기록에도 등장할 정도였다. 청나라 칙사들이 올 것이라는 소문은 이미 음력 6월 10일부터 기록되었다.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소현세자와 함께 머물렀던 신하가 청나라에서 칙사를 보낼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왔고, 조선 조정은 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부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던 탓에, 청나라 관련 문제는 최고의 이슈였고, 조선 조정 역시 가장 심각한 현안이었다.

칙사의 행차에 드는 비용부터 문제였다. 당시 조선의 재정 상태로는 사신 하나 맞이하기 힘들었다. 그 비용은 사대를 하는 나라의 필요만큼 증가하기 일쑤였고, 사대를 받는 나라 사신들의 사욕까지 보태지면 한 나라 예산 자체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게다가 조선은 당시 거둔 세금 대부분을 이미 조공으로 바쳤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칙사 맞이 비용 마련이 쉽지 않은 탓도 컸다. 결국 비상시를 위해 준비해 둔 지금의 국방비 격인 병조 예산까지 탈탈 털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정도의 비용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신은 세 명이 오는 것으로 정해졌는데, 이들은 각기 조선에 대한 요구를 하나씩 가지고 왔다고 했다. 사신 세 명이라는 말은 조선에 대한 청의 세 가지 요구를 상징했다. 핵심 요구는 당연히 군사와 은을 징발하는 일이었다. 명나라에 대한 정복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공국으로부터 전쟁 물자와 군사를 차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불과 몇 년 전까지 사대하던 명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와 군비를 마련해야 했으니, 심정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그러나 전쟁의 패자들이 감수해야 할 몫이었으니, 이미 각오는 한 일이기는 했다.

▲ 대한민국 사적 제101호, 서울 삼전도비 [사진=문화재청]

그런데 이것보다 더 조선 조정을 화들짝 놀라게 만든 것은 나머지 두 개의 요구였다. 당시 소문에 따르면 세 명의 사신 가운데 한 명은 왕비 책봉에 관한 일을 맡았고, 또 다른 한 명은 조선의 패배와 관련된 비석(이후 삼전도비가 됨) 세우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왕비 책봉 문제는 1635년 인조비인 인열왕후 사망으로 인해, 한 해 전인 1638년 국혼을 한 장렬왕후를 책봉하는 데 관한 일이었던 듯하다. 왕비 책봉은 남녀 구분이 명확한 탓에 보통 사신들이 황제의 칙서를 전달하면 조선의 여자 관원들이 모든 절차를 진행했던 게 상례였다.

그런데 이들은 왕비에 대한 책봉을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청나라 사신이 직접 왕비를 보고 책봉례를 거행하겠다는 요구였는데, 아무리 패전국이라고 해도 조선은 문화적으로 이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다행스럽게도 왕비 책봉 문제는 청의 풍속과 조선의 풍속이 다르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서로 이해가 되었다. 청나라 칙사 입장에서도 어짜피 내려진 칙령을 가지고 조선 왕실이 모욕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책봉례는 기존의 예에 따라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조선 조정의 분투는 눈물겹기까지 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이후 삼전도비로 불리는 조선의 패배와 관련된 비석을 조선 스스로 세우는 문제였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전쟁의 패배를 조선 스스로 인정하게 하는 방법으로, 조선인들 스스로가 쓴 비문을 돌에 새기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조선 입장에서는 전쟁에 진 것도 억울한데, 그 사실을 스스로 써서 비석까지 세워야 했으니, 그 굴욕감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누군가는 탐탁치 않은 반성문을 써야 했지만, 그 누구도 그 반성문에 자신의 이름을 내어주기 싫어했다. 비석을 세우는 첫 단계인 비문이 없었으니, 비석을 세우는 일은 요원하기만 했다.

실제 당시는 전쟁이 끝난 지 불과 2년 조금 더 지난 시점이었다. 당연히 전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분노와 적의敵意는 한 톨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의 이러한 감정을 증폭시키는 이율배반적인 일들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칙사들을 맞이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병자호란 때 자결함으로써 절의를 지킨 사람들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청과의 강화를 거부하여 청에 끌려가 죽은 대신들에 대한 애도 역시 공공연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 하나 굴욕적인 비문을 쓰겠다고 손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결국 인조가 나서야 했다. 왕명으로 이경전과 조희일, 장유, 이경석 등에게 비문을 쓰게 하여, 그 중에서 선택하기로 했다. 문장 꽤나 한다는 사람들이 왕명을 받았는데, 인조는 이 가운데에서 이조판서 이경석의 비문을 골랐다. 비문의 내용은 가능한 감정을 빼고 사실만 적는 형식을 띠었다. 청이 조선에 출병한 까닭과 조선의 항복, 그리고 삼전도에서 맺은 강화협정과 청태종의 평화적 회군 내용이 담겼다. 한 면은 한문으로, 우측면에서는 만주어로, 그리고 좌측면에는 몽골어로 새겨졌다. 글씨는 오준이 썼고, 비명碑名은 여이징이 썼다. 이렇게 완성된 삼전도비는 조선 사람들의 굴욕까지 가득 담아 조선 땅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