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빚이 지배하는 세상, ‘무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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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닥 10년 만에 빚이 5억이고 희망이 없는 X이야. 넌 좋은 집도 있고 결혼하고 애도 낳아야 하잖아. 술집 외상값 때문에 인생 조질래?” 단란주점 마담 김혜경(전도연)은 술집 단골을 매섭게 몰아붙인다. 혜경이 악착같이 외상값을 받아내는 이유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서다.

혜경은 과거 텐프로에서 유명했다. 그 세계를 주름잡았고 많은 돈을 벌었다. 사실상 폭력조직인 제이인베스트먼트 이사장의 눈에 들어 연인이 됐다. 이사장의 수하들은 혜경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렇게 잘 나가던 혜경이 나락으로 떨어진 건 ‘남자’ 때문이다.

조직폭력배 박준길(박성웅)과 사랑에 빠져, 이사장을 배신하고 준길과 달아났다. 준길은 혜경이 진 빚을 모두 갚고 떠난다는 조건을 내걸었지만, 지방 변두리 단란주점에 혜경을 담보로 맡기고 빚까지 얻어갔다. 혜경은 퇴물 취급을 받으며 준길의 빚을 대신 갚아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준길이 혜경을 협박한 조폭 황충남(이동진)을 살해하고 도주했다.

혜경은 준길의 도피를 돕고 도피자금도 대주고 있다. 혜경이 번 돈을 주식으로 날렸다는 서술이 보태지지만, 빚더미에 도망자 신세가 된 건 준길 때문이다. 그런데도 혜경은 준길을 믿는다. 담보로 맡겨서 미안하다면서, 도피 자금을 달라는 준길의 말에 싫은 내색도 내지 않는다. 몹쓸 짓까지 당해가면서 또다시 돈을 구하러 나선다. 혜경은 그런 여자다.

준길의 빈자리에 외로움을 느끼는 혜경에게 형사 정재곤(김남길)이 다가온다. 재곤이 혜경의 옆을 어슬렁거리는 이유는 준길을 검거하기 위해서다. 제이인베스트먼트 이사장의 후원을 받는 조건으로 준길을 불구로 만들기로 했다. 혜경이 일하는 술집에서 영업상무 이영준으로 신분을 위장해 곁을 감시하고, 밤에는 혜경의 집 앞에 차를 대놓고 잠복한다.

혜경 주변을 맴도는 이유는 오직 준길 때문인데, 어느 순간부터 재곤의 태도가 달라진다. 일 때문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혜경에게 집착한다. 혜경은 재곤이 자신을 사랑하는 건지 헷갈리는데, 결국 이 땅을 벗어나서 둘이 행복하게 살자는 준길의 가망없는 말을 믿는다. 혜경이 준길의 차에 타서 재곤이 마련해준 돈을 건네는 순간 형사들이 들이닥친다. 준길은 칼을 휘두르며 경찰의 포위망을 벗어나려 하지만, 재곤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다.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든 재곤은 형사로 분해 냉랭한 태도로 대한다.

그 후 혜경은 꿈도 희망도 없는 뒷골목 인생으로 전락한다. 그 전보다 더 지독한 나락으로 빠졌다. 허름한 뒷골목에 있는 단칸방에서 마약중독자인 연인을 보살피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것마저 재곤이 앗아간다. 재곤이 괴롭힘에 가깝게 혜경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도는 건 단순히 범인을 잡기 위한 것일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툰 것일까. 영화는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무뢰한(2015년)>은 어두운 세계를 다룬다. 혜경은 절박하게 희망을 묻는 밑바닥 인생을 산다. 재곤은 신분만 경찰일 뿐 조폭과 다름없는 짓을 벌인다. 준길은 혜경이 빚을 내어 마련해준 도피 자금을 도박으로 탕진한다. 혜경과 준길은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있고, 발버둥치지만 계속 추락한다. 낡은 주택과 어두운 내리막길인 출구, 악취가 풍길 것 같은 골목길까지 영화 속 장면이나 공간 전환이 빚어내는 모양새가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어두운 정서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대한민국 최고 배우로 꼽히는 전도연의 연기가 훌륭하다. 뻔한 역할을 같은 식으로 연기하지 않아서다. 무심하게 담배를 태우는 장면이나 허공을 바라보는 찰나의 표정이 혜경이 처한 상황을 단순하게 나타낸다. <무뢰한>에 대한 영화평이 엇갈려도 배우 전도연에 대한 평에는 이견이 없는 이유다. <무뢰한>은 제68회 칸 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았다. 배우 전도연 덕분이다.

<무뢰한>을 보고 있자면 혜경의 처지는 현실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다. 한국 사회의 가계부채는 1,800조 원에 이른다. 국제금융협회(IIF)의 <세계부채 모니터> 보고서를 보면, 올해 1분기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97.9%로 조사대상 39개국 중 가장 높다. 가계부채가 늘어나는 속도는 세계 3위다.

가계부채가 국가 내에 적정 수준을 넘어서면 부실 위험은 물론 소비 위축 등 거시 경제 변수에도 영향을 준다. 원론적인 진단이지만 현 부채 규모가 적정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건 위험단계를 지나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은행은 이미 임계 수준을 넘은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본다. 10명 중 1명꼴로 대출을 갚느라 쓸 돈이 없어지고 있으며, 부동산담보대출이 많았던 점을 염두하면 번 돈의 대부분이 부동산 대출 상환으로 빠져나가는 ‘빚의 굴레’에 빠져 있다.

빚이 지배한 세상은 영화에도 투영된다.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2006년)>과 <화차(2012년)>, <차이나타운(2014년)>, <남자가 사랑할 때(2014년)>는 빚에 대한 공포가 영화의 정서를 지배한다. 그런 시대가 됐다. 재곤은 빚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혜경에게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묻는다. 혜경은 대답한다. “도망쳐서 보통사람처럼 살 거예요. 난 요리도 잘하고···.” 하지만 혜경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모두의 현실처럼.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