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가상의 섬, 외교의 무기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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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울산시장에게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1736년 울산부사였던 권상일權相一은 지방을 잘 다스리는 지방관 본연의 역할을 넘어 외교 문제에도 일정하게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울산이 왜관이 있던 부산에서 가깝다 보니, 일본에서 오는 사신들을 맞거나 상대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울산이 일본과도 가깝다 보니, 풍랑을 만나 일본인들이 울산으로 밀려들기도 했고, 미숙한 항해술로 인해 울산항에 닻을 내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울산부사는 이들을 왜관으로 보내거나 본국으로 송환하는 일들을 맡을 때가 많았다. 울산부사가 비교적 일본과 외교문제에 정통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런데 1736년 음력 8월 21일, 울산부사 권상일이 들은 이야기는 실소를 금할 수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쾌하기도 하다. 동시에 우리 입장에서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왜관이 어떠한 의미를 가졌는지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시 조선 조정과 일본은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맞서고 있었다. 울릉도 주위의 풍부한 어업 자원으로 인해 고기잡이배들이 17세기 후반부터 울릉도를 둘러싸고 부딪치기 시작하다가, 1693년부터 본격적인 외교문제가 되었다. 당시 울릉도에는 안용복安龍福 등 울산의 어부 40여 명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일본인 배들이 울릉도에 들어와서 충돌이 발생하면서 안용복 등이 일본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당시 안용복은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의 영유권을 주장했고, 이는 결국 조선과 일본의 중요 외교 현안으로 비화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접위관接慰官 유집일兪集一을 파견했다. 당시에도 울릉도 영유권도 영유권이었지만, 실제 죽도라고 쓰는 지금의 독도가 울릉도에 포함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문제였다. 유집일은 독도의 영유권까지 포함한 울릉도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당시 유집일이 일본을 협박한 내용이 일종의 전설처럼 회자 되고 있었다. 이 기록이 있던 해 울산부사 권상일은 왜관에 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은 이 이야기를 기록해 두고 있는데, 지금 입장에서는 자못 웃음이 난다.

유집일이 일본을 협박할 때 이용했던 이야기는 백제도百梯島라는 가상의 섬이었다. 유집일의 말에 따르면 이 섬은 울산 북쪽에 있는 영해寧海와 평해平海 사이의 동해 건너편에 있는 섬으로, 도주가 별도로 다스리는 섬이었다. 아마 당시 유집일은 이 섬 역시 일본에 속한 대마도와 유사한 정도의 섬으로 규정했던 듯하다. 그래서 섬의 크기는 일본의 대마도 정도라고 하면서, 울산에서 순풍에 돛을 달고 항해를 하면 하루만에 닿을 수 있는 거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집일은 “너희들이 계속 울릉도를 두고 다투고자 한다면 왜관을 평해로 옮겨 백제도주와의 무역을 강화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이다”라고 겁박을 주었다.

유집일의 이 겁박은 대마도주를 비롯한 일본에게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누구나 잘 알 듯,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 지역은 풍성한 어업자원을 가지고 있어서 어부들이라면 누구나 욕심낼 만한 곳이었다. 게다가 울릉도를 거점으로 어업활동의 편의를 보장받고, 울릉도 자연환경이 만들어 낸 토산품을 채취하는 것 역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이익이었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는 그 이익이 부산에 있는 왜관을 잃는 것보다 크지 않았으며, 그만큼 부산의 왜관은 조선보다 일본에 더 중요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울릉도의 영유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대마도를 중심으로 한 일본은 임진왜란의 감정이 가라앉을 틈도 없었던 1607년 왜관 설치를 목적으로 성급하게 국교를 요청할 정도였고, 조선 역시 이해 부산항내 두모포에 왜관을 설치했다. 김령이 쓴 ≪계암일록≫ 등을 통해 보면, 왜적으로 인해 부모·형제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왜관에 낼 세금을 거두는 세태를 비판했을 정도였지만, 그만큼 일본에서는 왜관의 설치가 급했다.

특히 대마도 입장에서는 왜관 설치는 그들의 명운과 관계된 듯했다. 대마도 입장에서는 본국보다 가까운 부산을 통해 식료품을 비롯한 생필품을 조달하는 것이 유리했다. 더불어 부산을 통해 내륙을 향한 무역 거점을 왜관에 확보함으로써, 무역 중심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했다. 이러한 노력은 일본 내에서 외교를 중심으로 한 대마도의 입지를 튼튼히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일본의 무역 경제와 외교라는 두 축이 왜관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유일집의 말대로 조선이 백제도와의 교역을 강화하기 위해 왜관을 북쪽으로 옮긴다면, 대마도 입장에서는 이 모든 주도권과 이익을 포기해야 했다. 왜관이 멀리 떨어지면서 부산으로부터 들어가던 다양한 생필품 조달도 힘들 뿐 아니라, 어렵게 만들어 놓은 무역 주도권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유일집이 아예 백제도와의 무역을 활성화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으니, 이들 입장에서는 자신들과 대륙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를 완전히 빼앗기는 결과를 낳을 게 분명했다.

유일집이 실제 백제도의 존재 여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쩌면 백제도는 전설일 수도 있었고, 과장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일집은 왜관이 북쪽으로 옮긴다는 게 어떠한 의미인지는 정확하게 알았다. 다시 말해 외교관으로서 그가 제시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카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백제도의 실제 존재 여부를 떠나 백제도는 존재하는 섬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 지금도 얼토당토않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제2의 백제도라도 만들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일집처럼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외교적 전문성과 이를 실행시킬 수 있는 국가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