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외교는 국내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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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武官은 외적에 대항해야 하는 특성성, 그들의 근무지는 국경지역이나 일반인들이 살기 힘든 군사적 요충지인 경우가 많다. 특히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국경은 지뢰와 철조망을 둘러쳐진 무력 대치의 장소로, 일반인 접근이 불가능하다. 물론 유럽처럼 국경이 지역 경계를 넘는 관문 정도의 의미를 갖는 곳도 많지만, 그렇다고 조선시대의 국경이 그렇게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1787년 무관 노상추는 백두산 바로 아래에 있는 함경도 갑산진관甲山鎭官의 진동진 만호에 임명되었다. 무관이 국경지역에 배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한 지역의 최전선을 담당해야 하는 만호의 임무 역시 가볍지 않았다. 특히 국경 수비의 특성상 쳐들어오는 적도 막아야 했고, 동시에 국경을 넘어 청나라 지역으로 넘어가는 백성들도 단속해야 했다. 그런데 정작 힘든 일은 쳐들어오는 적을 막는 것보다 국경을 넘어 청나라 지역을 들락거리는 백성들을 단속하는 일이었다.

음력 8월 말에서 9월이 되면서 조선 백성들의 청나라 지역 출입이 잦아졌다. 막으려고 들면 막지 못할 일도 없겠지만, 문제는 이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청나라 지역을 드나드는 이유를 노상추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 이들의 출입에 대해 눈감지 않으면 진동진 만호인 노상추에게도 불이익이 닥칠 수 있는만큼, 눈에 띄면 막지만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색출해가면서 막을 수는 없었다. 알고보면 이 모든 게 결국 백성들을 위험에 내모는 조정 탓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백성으로 사는 데 있어서 참으로 힘든 일 가운데 하나가 다양한 세금이었다. 땅에서 나는 소출을 기반으로 국가가 운영되도록 세금을 내는 일이야 국민의 의무니 그렇다 치더라도, 무슨 일만 있으면 백성들의 곳간부터 털고 보는 국가의 재정 운영방식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훈련도감을 운영하기 위해 별도 세금인 삼수량을 내고, 왜관에 보낼 세금은 왜관이 있는 경상도 지역에 별도로 부과하며, 군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60세까지 군포를 납부해야 했다. 게다가 공물 대신 내야 하는 대동포도 있었고, 심지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춘궁기에 빌린 환곡도 가을이 되면 감당하기 힘든 세금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백성들에게 세금처럼 주어져 있는 또 하나의 의무가 바로 공물이었다. 공물은 원래 왕의 생일이나 국가의 경축일 등을 기념해서 지방관들이 그 지역 특산물을 가지고 하례하던 데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이게 나중에는 조정이나 중앙 관청에서 사용할 지방 특산물을 거두어들이는 세금으로 바뀌었다. 안동 예안은 은어, 포항이나 울산은 청어, 남해는 전복 등과 같은 식이었다.

노상추가 근무하던 갑산 역시 공물이 없을 리 만무했다. 지역의 특성(?)에 따라 공물이 부여되는 탓에 갑산은 삼蔘과 가죽을 공물로 내고 있었다. 얼핏 생각해도 백두산 아래 접경 지역이다 보니 산간지역이 많아 삼과 짐승 가죽을 쉽게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탓이다. 노상추 역시 부임하기 전에 공물 내역을 보고 크게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막상 부임해 보니 현실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기록이 보여주듯, 조선시대 대부분의 산은 민둥산이다. 산에 출입을 금하고 국가나 지방에서 엄격하게 관리한 산을 제외하면, 산의 나무는 대부분 겨울 난방용으로 벌목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국경지역인 갑산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특히 이 지역은 겨울이 오래 지속되는 데다, 기온까지 낮기 때문에, 산에 나무가 남아날 틈이 없었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을 제외하면, 갑산 주위의 산 역시 나무하나 남아 남지 않은 민둥산이었던 이유이다.

이렇다 보니 짐승이 살 수 있는 환경도 파괴되었고, 그늘에서만 자라는 삼 역시 자랄 수 있는 터전을 잃어버렸다. 올해 동해안 지역에 큰 피해를 가져다준 울진 산불의 실질적 피해가 향후 30여 년간 송이 생산을 불가능하도록 했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당시 이들의 고민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알 리 없는 조정은 동일하게 공물을 요청했고, 노상추가 부임했을 때는 왜관에서 사용할 삼까지 부과되어 지역민들은 삼과 가죽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산지역 백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가 바로 국경을 넘는 일이었다. 청나라 지역에 있는 산에까지 가서 땔나무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보니, 그래도 청나라 지역에 있는 산은 나무가 무성했다. 삼도 구할 수 있었고, 사냥할 만한 짐승들의 서식처도 꽤 있었다. 매월 공물을 직접 감봉해서 바쳐야 하는 노상추 입장에서도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강하게 단속할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경을 지켜야 하는 노상추 입장에서 이를 허락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1700년대 초반부터 청나라와 조선 간의 국경 문제는 이미 양국의 중요 외교 현안이었다. 당시에도 1780년대처럼 같은 이유로 많은 조선 백성들이 청나라 지역을 드나들었고, 이 과정에서 청나라 사람들을 살해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1712년 청나라는 국경을 엄밀하게 정하자고 엄포를 놓았고, 조선에서는 국경을 몰래 드나드는 백성들을 단속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이래저래 쉽지 않은 상황이 당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모든 원인이 공물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 지역의 공물에 대해서라도 유연한 운영을 했으면, 갑산의 백성들이 국경을 넘을 일은 많지 않았을 터였다. 삼과 짐승 가죽이 아니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청나라 땅을 드나들 이유는 크게 없었다. 그러다 보면 청나라와의 마찰도 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이렇게 되면 국경이 중요한 외교 현안으로 떠오르지도 않았을 터였다. 결국 외교라는 것도 국내 문제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한 번 더 새겨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