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람의 앞으로 Afro] Art Film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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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예술활동 무대를 온라인으로 옮기게 했다. 온라인 공연의 장점으로 방구석 1열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도태되지 않으려는 예술계가 발버둥 치는 격동의 시기, 대구문화예술진흥원(구.대구문화재단)은 2021 문화예술 랜선프로젝트 일환으로 문화예술 창작콘텐츠 영상화 지원사업 공모를 냈다. 어려운 시국에 뭐라도 열심히 하자 했던 나는 급히 머릿속의 파편들을 모으고 짜내어 원따나라의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기획서를 썼다. 이른바 ‘재생再生;거듭태어나다’ 프로젝트. 기획이 선정돼 작년 아트필름 ‘O’를 제작했고, 올해 1월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에서 상영회를 하였다.

아트필름 ‘O’는 2022 천안춤영화제 댄스필름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발표 후 한동안 잊고 지내다 처음이자 딱 한 번 내본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으니 놀랄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기념하여 새로운 도전기, 아트필름 오의 작품해설과 제작기를 소개한다. (반드시 좋은 스피커나 이어폰으로 사운드 빵빵하게 감상하길 추천한다.)

영상제작을 위해 제작진부터 모아야 했다. 분야별로 누구를 섭외할지 특별한 고민은 없었다. 나는 가끔 우연한 상황에서 영감을 받을 때가 있다. 지난 작업에서 작곡가 서영완 선생님의 사운드와 나의 타악 음악을 교차시킨 부분이 있었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를 타고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그 느낌을 확장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품에 항상 진심인 모습과 춤음악, 영화음악에 깊은 이해와 경험이 많아 의지하고 신뢰할수 있었기에 서영완 작곡가에게 가장 먼저 연락했다.

동갑내기인 권효원 안무가는 지역에서 걸어온 꾸준하고 굳건한 발자취가 자극이 되는 존재였다. ‘언제 한번 밥 먹자’라는 인사처럼 ‘언제 한번 재밌는 거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냉큼 이 작품에 합류시켰다. 그래서 현대무용이 선택됐다.

애초에 지원사업은 문화예술 창작콘텐츠를 ‘영상화’하는 작업 이름이었다. 하지만 영상 콘텐츠로써 예술작품을 만드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단순히 예술작품을 카메라에 잘 담기보단 영상, 영화라는 장르 자체로 만들 창작력과 연출력이 있는 감독을 원했다. 찜해놨던 이영민 감독은 이미 그 전해에 공연영상 작업을 의뢰했다가 쉬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던 경험이 있어서 다행히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제작진 섭외를 마치고 첫 회의에서 여러 아이디어가 오갔다. 그 후 덜컥 겁이 났다. 영상 콘텐츠 제작은 나도 처음인데 바쁜 사람들 모아놓고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구원주로 우리 지역에서 귀하디 귀한 청년 기획자로 한창 주가가 상승 중인 유슬아 제작PD를 섭외하면서 어벤져스가 탄생했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대학교를 짓다가 중단된 폐건물은 둥근 탑 형태로, 바닥에서 천장까지 뚫려 있었다. 원의 둘레를 따라 복도와 칸칸이 방들이 있고, 계단을 타고 뱅글뱅글 돌며 오를 수 있는 형태가 마치 하늘에 닿고자 한 인간들의 욕망이 지은 바벨탑을 떠오르게 했다. 제목 O는 이 탑의 형상을 뜻하기도 하고, 탑 안의 세상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우선 탑 안 세상에 사는 3명이 등장한다. 한 명은 유약하고 어린 소녀로 얼굴 안에 갇힌 (어떤 틀에 갇힌) 춤을 춘다. 또 한 명은 강인하며 하루의 일과를 멋지게 해내는 슈퍼우먼 같은 존재다. 나머지 한 명은 반항적이며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우선시하는 인물이다. 세 캐릭터가 특정된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다양한 개인의 모습을 뜻할 뿐이다.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고 역할에 맞는 무용수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꼭 섭외하고 싶어 안무가에게 추천한 박정은 무용수와 안무가가 추천한 이재형, 손하은 이렇게 색채가 다른 무용수 3명, 그리고 나를 포함한 원따나라 연주자 6명, 정해진 재료를 놓고 무슨 이야기를 할지 고민했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모자를 쓴다는 것은 각 개인의 생각과 가치를 묻어두고 사회집단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들은 각자의 방에서 나와 전체가 흘러가는 무리의 흐름 속에 생각과 몸을 맡긴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이 장면은 특별히 이영민 감독의 욕망이 담긴 장면이다. 처음에는 무용수 3명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려 계획했지만, 가두리 양식장에서 뱅글뱅글 도는 멸치떼들의 모습에 꽂힌(?) 영민 감독이 군중씬을 강하게 제안했다. 많은 인원을 어디서 섭외하나 고민하던 중, 우여곡절 끝에 대구시립무용단을 섭외했다.

원따나라가 음악과 라이브연주로 참여한 대구시립무용단의 DCDC 작품을 한 인연이 깊었기에 가능했다. 마침내 이루어졌을 때 흥분은 잊히지 않는다. 집단씬이 이렇게 멋지게 나오도록 가능케 했던 대구시립무용단과 일이 성사되도록 밀어주시고 현장에서도 여러 집단씬 안무를 해 주신 김성용 감독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집단씬으로 미장센은 더욱 풍성해졌고, 사회집단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내었다. 그것은 기계적이며 반복적인 일상의 모습이었다. 이익이 있는 곳을 향해서 뒤돌아보지 않고 가는 폭주 기관차가 되기도, 공동체라는 탈을 쓰고 내 것,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견고하게 뭉치며 배척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띄기도 한다. 집단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는 소외되기도 또, 누군가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자각의 북소리, 그것은 자아의 질문일 수도 외부로부터의 자극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소리를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또는 들어도 외면한다. 누군가는 마침내 고개를 돌린다. 탑 안 세상의 모습은 서영완 선생님의 사운드로만 채웠고, 여기서 부터 두 음악의 합작도 시작된다. 내가 만든 타악리듬 넘버에 서영완 선생님은 공간감과 색체를 입히고 무용수들의 세부적인 움직임에 힘을 불어 넣었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소리의 실체를 마주하는 결심은 어려운 일이다. 사회와 자신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은 꽤 고통스러울 것이다. 우리 주인공들은 그 여정을 떠난다. 니체가 이야기하는 그저 충실한 낙타의 삶에서 비로소 자유를 쟁취하는 사자의 삶이 시작된다. 무용수들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춤을 춘다. 하지만 아직은 각자의 길, 타인의 존재이다. 세 인물이 그 과정에서 겪는 내면의 갈등과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트랜스적인 창작 타악 음악으로 극대화 시켰다. 그것은 마치 꿈속,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그들은 마침내 다다른다. 그리고 그곳엔 어떤 존재들이 있다. 영화는 크게 4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 안의 세상이 1막, 자각의 북소리를 따라 떠나는 혼란스러운 여정이 2막, 그리고 마침내 3막이 시작하며 가두리 양식장 같은 탑과 대비되는 대자연이 펼쳐진다. 제작진을 모을 때부터 나는 대비되는 장르의 합을 기대했다. 미래와 과거의 모습, 미래지향적인 음악과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음악, 인위적인 건축물과 대자연, 원따나라의 토속적이고 원초적인 타악 음악 및 비쥬얼과는 상반되는 현대무용과 가상 사운드를 엮어 모순적인 조화를 이루고 싶었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제목 ‘O’ 앞에 굳이 아트필름이라는 말을 자꾸 붙이는 이유는 댄스필름과 같이 기존의 장르를 특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춤으로 전체를 이끌어 가기에 댄스필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영화에서 뮤지션은 배경음악만이 아닌 시나리오에 갈등 상황을 해소하는 핵심적인 역할로 등장한다. 3막은 뮤직비디오에 더 가까운 형상을 띄며 3막만 독립적으로 떼어놓아도 하나의 작품이 된다. 그리고 전체를 봤을 때 분명 영화적인 네러티브가 존재한다. 어느 장르에도 충족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댄스필름이라고 할 수도 있고, 뮤직비디오나 독립영화라 할 수도 있다. (우길 수 있다.) 3막의 음악은 원따나라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전통적인 서아프리카 리듬을 편곡하여 만뎅 타악의 풀 구성으로 연주했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사실 원따나라에게 극 중 역할을 부여 할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역할을 부여할 것인가는 큰 고민이자 숙제였다. 자칫하면 억지스럽거나 전체 그림을 해칠 수도, 우리 정체성을 해칠 수도 있었다. 원따나라는 탑 안의 세상에 신호를 준, 경각심을 일으킨 세 인물 본인의 모습이기도 하며 내면의 세계, 또는 꿈과 환상으로 연결한 존재이자 자연, 유년시절, 순수, 꿈, 자유, 놀이라는 상징적인 것을 사람형태 유기물로 표현한 것이다. (의도적으로 여신처럼 보이게 했다. 참여한 원따나라 멤버 모두 여성이어서 생명의 모태라는 의미도 부여했다. 하지만 신적인 존재는 아니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구슬을 전해 받은 세 인물은 어린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하게 그 구슬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삶의 굴레와 탑을 상징하는 평면적인 O에서 ‘구’의 모양인 입체적인 O가 탄생한 것이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그들은 더는 타인이 아니라 유대하는 존재로 함께 춤을 춘다. 어쩌면 그들은 진짜 어린 시절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해가 저물도록 무아지경이 되어 함께 춤을 추고 논다. 니체가 말하는 사자의 삶, 사자의 정신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거듭난다. 우리는 이 해가 지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해뜨기 전 컴컴한 꼭두새벽에 황매산 정상에 악기를 들고 장비를 들고 올랐다. (물론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차장이 있었다.) 실제 일몰 상황에서는 촬영지에 관광객이 많을 것을 우려해 일출 때 촬영하고 반대로 연출한 것이다. 11월 초에 촬영했기에 정말 춥고 고생스러웠지만, 그날 쏟아지는 하늘의 별빛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억새가 가득한 광활한 자연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4막. 탑 안의 세상은 여전하다. 얽히고설킨 사람들은 다양한 현상과 모습을 만들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더욱 견고해진 집단 규범과 가치를 추구하며 안전한 탑에서 낙타의 삶을 살아내 간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깨알같이 등장하는 탑 위층 원따나라. 하지만 탑 아래 사람들은 여전히 보지 못한다. (관객들도 눈 크게 뜨고 봐야 보일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나 자신을 회복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떠올려 보자.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세 인물은 탑 안의 현실로 각자의 구슬(이때는 실제 오브제를 쓰지 않고 손동작으로만 표현한다)을 가져오고 서로 연대하며 그것을 지키려 애쓴다. 이내 각자의 구슬은 하나로 합쳐지고 더욱 입체적이고 큰 ‘구’의 O가 탑의 하늘로 쏘아 올려진다.

▲ [사진=Art Film_O 스틸이미지]

몰려든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그것을 올려다본다. 아마 이들의 세상에 작은 변화가 시작된듯하다. 이제야 보이는 각자의 다른 모습들. 모자를 벗는다는 것은 인간성의 회복, 자아의 회복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자각의 울림을 들을 수 있었던, 고통의 여정을 감내한 이들로 인해 개인뿐 아니라 사회에도 새로운 시선,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영화는 처음 탑 안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던 사운드로 막을 내린다.

1차 로케이션이였던 김천의 폐교건물 곳곳에는 벌집과 벌떼가 군집해 있었는데, 능력자 유슬아PD가 촬영 하루 전에 소방차를 불러 모두 제거했다. 화장실도 없는 폐건물이라 대구시립무용단이 촬영할 동안 원따나라 단원들이 자차로 화장실 셔틀도 운행하며 스텝 역할도 톡톡히 했다. 촬영장 청소부터, 휴게실을 만들고 무용수 겉옷도 챙기고, 마지막에 의상을 갈아입고 탑 위층의 원따나라 씬을 촬영했다.

권효원 안무가는 새벽 메이크업 장소에서부터 세 무용수와 동행하며 틈틈이 수정 분장도 직접하고, 음악도 틀고, 무용수의 촬영을 모니터링했다. 날씨도 추운데 대구시립무용단은 김성용감독님의 지휘아래 많은 장면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내 주었고 심지어 날씨도 추운데 먼지 덮힌 찬 바닥에 드러누워야 했다. 그원성은 시립무용단 감독님이… 그 와중에 이영민 감독은 반팔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촬영을 하고 있고, 유슬아PD는 남편까지 대동해와서 종일 포그머신을 돌리고 ‘죄송합니다’를 연신 입에 달면서 상황을 진두지휘했다. 일을 벌인 나는 막상 현장에선 할 일은 없는데 그저 송구스러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한편으로는 유능한 자들을 모아 협업하니 알아서 굴러가는 상황에 쾌감이 들기도 했다.

작가도 미술작가도 없는 환경에서 시나리오 작업, 의상, 소품도 우리가 직접 구상했다. 10시간 넘게 사전녹음을 하고 황매산에 가기 위해 새벽 3시에 모여 미친사람들 같다며 실소를 터트리고, 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연주하고. 더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너무 많아서 이쯤에서 마무리 하려고 한다. 돌이켜 보면 고생스럽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더 많았던 거 같은데 영화속 세 인물처럼 우리는 그 고통은 감내하고 구슬을 얻었다.

오오극장 상영회 당일까지 마지막 편집을 손 놓지 못한 영민 감독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지만 최종본은 상영회 전 극적으로 나왔다. 상영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 제작진과 뒤풀이 장소에서 한잔하며 유튜브 실시간 발표로 작품을 다시 한번 감상할 때 그때의 기쁨은… 그맛에 우린 고생스러운 길을 또 걷게 되겠지.

원따나라의 재생 프로젝트. 아트필름 ‘O’ 가 좋은 작품으로 마무리될 수 있게 각자의 역할에서 헌신적으로 힘써 준 제작진, 출연진, 참여해준 모든 예술가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또한 제작비를 지원해주고 우수작품으로 밀어주며 작품 홍보에도 힘써주신 대구문화예술진흥원에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