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사소한 파국, ‘달콤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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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호텔의 스카이라운지 ‘라 돌체 비타(달콤한 인생)’. 깔끔한 수트 차림의 선우(이병헌)는 케이크를 한 점 뜨고 있다. “아래층에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디저트를 마저 먹고 창밖 야경을 감상하더니, 호텔 나이트클럽으로 내려간다. 말썽을 일으킨 3명은 선우에게 제압된다. 수트는 어디 하나 흐트러진 곳 없다.

선우는 잘 나가는 조직의 이인자다. 강 사장(김영철)은 선우를 신임한다. 냉철하고 명민하기 때문이다. 일처리에 빈틈이 없고 욕심도 없다. 단점은 강 사장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받지만 다른 이들과 협잡하는 것을 싫어하는 탓에 내·외부에 적이 많다는 것이다. 일백 번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내쳐진다. 깨끗한 유리컵에 따라놓은 물의 표면에 티끌 한 점 떠오르면 이 물이 더럽다고 느껴 그 물은 버려진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어느 날 강 사장은 선우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한다. 젊은 애인 희수(신민아)에게 딴 남자가 생긴 것 같은데, 감시해보라는 것이다. 그는 선우에게 농담을 던진다. “애인 있어? 사랑해 본 적 있어? 없어. 넌 없어. 그래서 이런 일을 너한테 시키는 거야,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야. 인마.”

선우는 희수를 감시하다가 묘한 감정이 든다. 희수가 춤을 축고 첼로를 켜는 모습을 훔쳐보다가 설레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이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다. 정확하던 판단력이 흐트러진 것이다. 결국 희수의 밀회를 발각하는데도 특별한 이유 없이 덮는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강 사장은 선우에게 무자비한 응징을 한다. 용서를 빌지 않은 선우는 가까스로 도망쳐 겨우 몸을 회복한 뒤 복수를 다짐한다.

복수에 나선 선우는 강 사장을 대면하고, 절규한다. “저 진짜 죽이려고 그랬습니까? 7년 동안 당신 밑에서 개처럼 일해 온 나를. 무슨 말이든지 좀 해봐!” 둘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선우는 강 사장을 죽인다. 선우는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고 상대를 모두 제거하지만, 자신도 치명상을 입는다. 선우는 숨이 끊어지기 전에 희수에게 전화를 걸지만 휴대폰을 놓친다.

<달콤한 인생>은 한국에서 조폭 영화가 유행처럼 불었던 시기에 개봉했다. 하지만 여타 조폭 영화와 다르게 세련됐다. 배신과 암투, 보복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름의 철학도 매력적이다. 강 사장과 선우의 갈등은 몹시 사소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 선우는 충직한 인물이다. 강 사장의 명령에 따라 개처럼 짖고 물어뜯고 핥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 사장의 개인적 부탁을 수행하다가, 강 사장의 눈 밖에 난다.

선우는 강 사장의 의중을 눈치 채지 못했다. 강 사장은 희수를 억지로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집과 선물로 젊은 여성을 옭아맬 수는 없다. 희수는 젊은 남성을 몰래 만나고, 신임하던 선우는 희수에게 연정을 품은 것 같은 의심이 든다. 냉철하게 희수를 처리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자신에게 비밀로 하고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젊고 잘생기고 유능한 선우는 늙고 볼품없어진 강 사장의 추레함을 부각시킨다. 선우의 존재는 초라한 강 사장을 비추는 거울이다. 강 사장이 별것도 아닌 일로 모욕감을 느껴 신임하던 부하를 제거하려고 마음먹은 대목이다. 강 사장의 독백을 찬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꽤 똑똑한 친구가 제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에게 심부름을 하나 시켰는데 사소하게 생각했던지 실수를 저질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대단한 실수도 아니고 가볍게 야단치고 끝날 일이었죠. 그런데 그 친구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죠. 아닐 수도 있어요. 내 착오일 수도 있는 거죠. 근데 조직이란 게 뭡니까? 가족이라는 게 뭡니까? 오야(두목)가 누군가에게 실수했다고 하면 실수한 적이 없어도 실수한 사람이 나와야 되는 거죠. 간단하게 끝날 일인데 그 친구 손목 하나가 날아갔어요. 잘 나가던 한 친구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끝장이 났습니다. 이번 일은 손가락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달콤한 인생>은 조직의 위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선우는 강 사장의 위계를 거스르고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몰락한다. 결말은 파국으로 이어지는데, 그는 어떤 불행과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끝까지 간다. 사회생활에서는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워도 조직의 위계에 머리를 조아리는 게 현명하다고 알려준다. 잘못한 게 없을지라도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어떤 조직이든 갈등이 벌어지면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조직 내부 이해관계를 고려해 결정된다. 조직이 바라는 선택을 하지 않으면 기다리는 건 파국뿐이다. 달콤한 인생은 너무 멀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