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박봉이 만드는 공무원의 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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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12월은 평가와 인사이동의 계절이다. 인사라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평가는 늘 존재하지만, 1795년 음력 11월은 유난히 엄한 평가가 이루어졌던 듯하다. 특히 지역과 변방에 근무하는 진영장들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이 평가가 지금으로 치면 감사에 준하는 수준으로 진행된 듯하다. 조사된 내용이 보고서(장계)로 꾸며져 왕에게 올라갔고 그에 따른 처분들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업무를 잘 한 사람들이야 연말 인사에 반영될 터이니, 당장 눈에 띄는 조치는 없었다. 문제는 업무에 하자가 있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으로 치면 업무태만부터 불법적으로 백성들을 수탈한 일까지 다양했다. 이 때문에 전임 혜산첨사惠山僉使 변덕순邊德淳은 소를 도살하고 불법으로 곡식을 거둔 죄를 물어 길주에 유배가는 벌을 받았다. 그리고 (함경도의)운총雲寵 만호는 파직되었다. 전임 별해첨사別害僉使 김방金坊 역시 불법으로 곡식을 거두어들인 사실이 드러나, 의금부로 잡아들이라는 명이 내려졌다.

김방은 무겸선전관이 된 후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가 있는 상태였다. 무과 합격하기보다 더 어렵다는 선전관이 되어, 그야말로 편안한 마음으로 고향에 가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별해첨사로 있으면서 했던 행적이 문제가 되어 의금부로 압송당해야 했으니,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 하는 상태였다. 이레 뒤, 노상추는 김방이 도성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김방을 찾았다. 자초지종을 들어볼 요량이었다. 그리고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장부나 기타 서류라고 있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찾아보게 했다. 무엇이든 도울 게 있으면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김방의 죄목 역시 전임 혜산첨사 변덕순처럼 불법으로 백성들로부터 곡식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적용되었다. 백성들로부터 불법으로 쌀을 거두었다면 이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한 것이니, 관리로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범죄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노상추가 김방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여기에는 김방의 실수와 오해가 섞여 있었다. 지금처럼 세금제도가 명확한 상황에서도 실수가 종종 나오고 있는 점을 상기해 보면, 김방 역시 억울한 점이 적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변방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다보니 변방에 근무하는 무관들에게는 녹봉이 되는 요미料米(관료들에게 급료로 주던 쌀)를 중앙정부에서 모두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민간에서 조금 더 거두어 급료로 가져 가게 한 적이 있었다. 이유도 있었다. 9년 전, 함경도에 속한 삼수부三水府 내 6진 변장들의 요미를 남쪽에서 거두어 지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경우 이 급여를 다시 수송하는 게 문제였다. 각 진의 진졸들이 자기 진영 변장들이 받을 급여를 남쪽 읍까지 와서 받아 다시 함경도로 수송하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쪽에서 받아야 하는 요미를 각 지역에서 거두도록 했다.

그러나 수송이 힘들다고 각 진영장들이 자기 지역에서 요미를 알아서 거두게 하니,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급여를 중앙에서 조정하고 관리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진영장 개인에 따라 지역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우기 시작했다. 대부분 자기 욕망의 범위를 채우려 했고, 격오지 근무에 대한 인센티브까지 생각하는 진영장도 있었을 터였다. 그야말로 백성들의 부담은 지역 진영장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몇 년 전에 정민시鄭民始가 함경 관찰사로 있으면서, 해당 진에 모미耗米를 떼어 주고, 별도로 백성들로부터 곡식을 거두는 것을 금했다. 모미란 환곡을 받을 때 붙인 이자로, 모미를 통해 진영장들의 급여를 충당하고 개인이 백성들로부터 곡식을 거두지 못하게 했다.

잘못된 제도가 일정 기간 실시되기는 했지만, 이게 혁파된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김방은 이를 모르고 자기의 급여성 곡식을 백성들에게 계속 거두었던 듯하다. 약 1년 정도 그랬다고 하니, 단순 실수라고 하기에도 꽤 긴 시간이었다. 김방에 대한 당시 조사관의 보고서에도 “김방이 거두어들인 39섬은 그 값을 따지면 1백 냥에 불과하지만, 적은 물자라도 그 죄가 무겁고 중대하니 통탄스럽습니다”라고 했다.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고의성과 지속성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노상추로서도 더 이상 김방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 결국 김방은 명천부로 유배되었고, 노상추는 이 추운 겨울날 유배지로 가야 하는 동료를 걱정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조선시대 지방민들이 관료들의 급여나 비용을 감당하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급여만 부담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선 기본 법전에 해당하는 <경국대전>은 조선 관료들의 급여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보면 팍팍하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었다. 시대에 따라 급여 내용도 달라지기 때문에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말단에 해당하는 종9품의 경우에는 한 해 기준 곡식 12석과 옷감 4필 정도가 급여의 전부였다. 부부끼리 아껴가면서 생활해도 경제적인 문제로 허덕일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조선 최고의 직위인 영의정의 경우에는 8~9명 정도의 대가족이 충분히 먹고 남을 분량이기는 하지만, 이 역시 대규모 재산을 축적할 수준은 안 되었다.

이렇게 되니 지방관으로 나가 있는 관료들의 경우 양의 차이만 있을 뿐, 너무 당연하게 백성들을 수탈했다. 세금 수취 권한을 가진 지방관 입장에서는 백성들에게서 조금만 더 거두면 그만큼 개인 수익이 되었다. 굳이 탐관오리까지는 아니라 해도, 세금 수취시 좀 더 많은 양을 거두어 관아와 개인의 비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지방관이 누구인가에 따라 백성들 삶의 질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큰 권력을 가진 자가 충분한 수입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 차이만큼 권력을 이용해 백성들을 수탈했기 때문이다. 권한만큼 수입을 보장하고, 비리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묻는 지혜는 이때부터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