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규 칼럼] 보릿고개 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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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에게는 쌀 다음 주식이다.
가난의 상징에서 건강식품으로 우뚝 섰다.
늦가을에 씨앗을 뿌려 겨울을 나고 초여름에 수확한다.
겨울이 지날 무렵 뿌리가 땅에 내리도록 밟아 줘야 한다

위 식물은 무엇일까요? 보리이다. 추운 겨울 땅속에서 자라 병충해에 강하고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춘궁기 굶주림을 면하게 했고, 희망을 준 곡물이다.

60년대 초까지 만해도 가을에 쌀을 수확하면 봄이 올 무렵 다 떨어졌다. 초여름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했다. 조금만 더 견디면 보리를 먹을 수 있다고 희망페이 ‘보릿고개’가 생겼다. 요즘 다들 힘들다고 한다. 그때 배고픈 시절에 가졌던 희망을 지금 우리도 가져 보자.

요즈음 자라는 세대는 유행가 ‘보릿고개’의 첫마디 “아이야 뛰지 마라, 배 꺼진다” 그 노랫말이 와 닿지 않으리라. 배고팠던 시절을 얘기하면 공감하지 못한다. “라면이라도 끊여 먹지”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배고픈 시절을 살아 온 60대 이후세대는 보리에 얽힌 가슴 시린 추억이 많다.

63년생인 필자는 70년대 초반, 초등학생 시절 2월 중순경 동네 사람들과 함께 보리밟기를 했다. 이유도 모르고 보리를 밟으면 죽을까 살살 밟았다. 서릿발 때 땅이 얼었다 녹으면서 들뜨면 보리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를 방지하고자 보리를 밟아 뿌리를 내리게 한 것이다. 이런 과정은 인생사와도 닮았다.

초여름 보리타작을 할 때 동네 사람들은 품앗이로 했다. 그 어떤 대가도 없이 함께 일하면 되었다. 까끄러운 보리타작도 신바람 나게 하였다. 보리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보릿고개를 넘기 때문이다. 또 함께 일하면서 터놓고 소통하며 공감하면서 모진 시기를 견뎌 낼 수 있었다.

당시 정부는 부족한 쌀을 메우고자 보리밥을 먹으라고 혼식을 강조했다. 학교 점심시간 때 선생님께서 일일이 도시락을 확인할 정도였다. 일부 학생들은 도시락 위는 보리밥이고, 아래는 쌀밥을 싸 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절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학생들이 더 많았다.

그때 그 시절 보릿고개를 다시 돌아가 본다. 허기진 배를 잡고 춘궁기를 극복한 것은 보릿고개 넘어 희망을 보았기에 가능했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앞날이 어둡다고 한다.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지 않은가. 지금 동트기 전이다고 생각하자. 희망을 갖자. 보릿고개를 넘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