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이립잔치’, 30+30 모녀가 더불어 나이 먹어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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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명절마다 반복하는 ‘티키타카’의 순간을 극화하다

2023년 음력 설 연휴가 소리 소문 없이 지나쳐갔다. 흔히 설과 추석에는 민족대이동이 벌어지고 오랜만에 흩어졌던 가족이 상봉한다고 하지만, 매년 공식적인 재회의 반가움 뒤편에서 나날이 해체되어가는 가족의 앙상한 실상이 드러나 씁쓸한 기분을 자아내기도 한다. 오죽하면 명절에 얼굴 보는 순간만 반갑고 그 다음부턴 안 보느니 못하다는 토로가 숱하게 등장하는 지경이다. 예전엔 아무리 바쁘고 성가셔도 ‘의무방어전’ 형태로 잠깐 다녀가더라도 자신의 기원이자 뿌리라 할 ‘고향’을 찾았지만 이제는 사전 혹은 사후에 얼굴 한번 비추거나 확실한 성의 표시(입금이나 선물)로 적당히 처리하고 미뤄둔 해외여행이나 휴가를 떠나는 게 딱히 특별하지 않은 행태로 자리를 잡았다. 10년 전 쯤에는 ‘패륜아’까진 아니라도 눈총 단단히 받았을 법한 일인데 말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게 마련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고, 최후에 의지하고 기댈 곳은 가족이라는 데 대해선 이견이 별로 없지만, 내가 아쉬울 때 말고는 간섭을 피하고픈 게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간섭은 최소한, 보탬은 최대한까지 놀부 심보까진 아니라도 대개 비슷한 심정일 테다. 특히 압축성장 과정에서 타국에 비해 사회변화와 그로 인한 세대 간 단절이 극심해진 현대 한국사회에서 그런 경향은 순식간에 ‘대세’가 되어버렸다. 그 자리를 ‘가족’이란 외피는 동일할지언정 그 속내는 전혀 다른 일종의 ‘신분’ 혹은 ‘계급’이 대체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물려받을 게 전제된 형태가 과연 우리가 알던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의문은 남는다. 상속될 지대, 혹은 누릴 수 있는 물적 조건 외에 과연 한 세대가 더 지나면 ‘가족’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

▲영화 ‘이립잔치’ 스틸 사진

남가원 감독의 <이립잔치>는 정확하게 딱 명절 기간 우리네 가족 구성원들이 겪게 마련인 어떤 ‘풍경’을 다룬다. 이제 나이가 들고 머리가 굵은 자식 세대는 하지만 아직 부모 세대의 시선으로건 자기 스스로 판단하건 온전히 자립하진 못한 경우가 많다. 부모 세대는 그렇게 부모 말 안 듣고 제멋대로 하면서도 정착하지 못하는 자녀 세대를 못 마땅해 한다. 끈끈한 혈육의 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서로 간에 어긋난 기대와 일방적인 단정은 좋은 명절에 앙금을 남기곤 한다. 그런 과정을 우리는 거듭 반복하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영화는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감독 본인의 자전적인 체험담을 기반에 두고 실제 겪었을 모녀관계를 재구성해 한 폭의 풍경화를 관객에게 선보인다. (감독의 어머니는 영화 한 장면에 특별출연으로 등장한다)

◆ 엄마 환갑을 기념하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 30살 딸

타지에서 카페 일을 하며 지내던 유영은 대구 옆 경산, 그 동네에서도 꽤 외곽인 자인에 남아있는 어머니 혜자의 60살 환갑을 맞이해 ‘천만 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비도 부슬부슬 내리는 와중에 트렁크를 끌고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 있는 유영의 방엔 잡동사니가 가득하다. 늘 비어있는 방이고 집에 잘 다녀가지도 않는다며 혜자가 갖다놓은 세간들이 꽉 들어차있기 때문이다. 집에 거의 찾아오지 않는 자신 탓일 수도 있건만 누구나 그렇듯 빈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 광경을 목격한 유영은 슬슬 기분이 상하기 시작한다.

고기 집에서 일하는 혜자가 퇴근 후 귀가하면서 두 사람은 참 오래간만에 재회한다. 하지만 두 모녀 사이의 대화는 영 서먹할 뿐이다. 뭔가 이야기를 이어가보려 서로 말문을 트긴 해도 이내 툭툭 끊어지기만 하지 삭막하기 그지없다. 어찌되었건 무거운 발걸음을 한 채 먼 길 넘어온 목적이 있으니 둘은 다음날 모녀간 회식자리를 가지기로 한다. 1차 휴전이다. 하지만 오랜만인 외식을 위해 아침에 목욕탕에 들렀을 때부터 둘은 티격태격 충돌을 거듭한다. 굳이 별로 친숙하지도 않은 엄마 친구들과의 안부 나눔은 딸에겐 불편한 자리일 따름. 한번 틀어진 관계는 뒤끝 작렬이다. 모녀는 서로 꽁하게 불편함을 간직한 채 별 것 아닌 일에 감정을 투영하며 대거리를 이어나간다. 그런 둘의 대립은 좋은 취지로 마련한 외식 자리에서 절정을 맞는다.

▲영화 ‘이립잔치’ 스틸 사진

둘이 내세우는 대립 항은 실은 핑계일 뿐이다. 스파게티를 먹고 싶었건만 조금 아끼고자 주문했던 런치 세트에는 스파게티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주문도 하나 제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 딸에게 뭔가 쏟아내려던 엄마의 꼬투리는 멀쩡한 고기에 핏물 남았다는 명목으로 극점에 달한다. 식당과 다른 손님들은 무슨 죄인가 싶어질 만큼 둘은 모녀 관계보다는 터울 안 나는 자매 마냥 고성을 지르며 다툰다. 서로 머쓱한지 둘은 각자의 길로 헤어진다. 과연 모녀는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궁금해질 무렵, 단편영화의 결말을 규정하게 될 분기점의 순간이 도래한다.

여기에서 감독은 공들여 준비해둔 장치를 꺼내든다. 도입부에서 처음 소개된 정적인 장면이 다시 한 번 동일한 패턴으로 재현된다. 하지만 단순한 반복이 아닌 변주의 형태다. 머릿수도 늘었다. 한 사람에서 두 사람이다. (아빠가 부재한 가운데) 엄마와 딸, 단 둘로 구성된 초소형 가족 구성에서 1+1=2+a가 된다는 상징을 구현하는 점층법적인 방식을 그림처럼 구현해낸다. 대사나 설명이 억제되고 비언어적 수단으로 모녀가 교감을 나누는 풍경이 아주 느리게 연결되는 찰나를 통해 이 극적인 분기점은 물이 포도주가 되는 마법의 장면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모녀는 점심때 달성하지 못한 회식만찬을 저녁 늦어서야 조촐하게 치른다. 그렇게 딸은 유예된 귀향의 목표를 달성하고, 엄마는 오랜 냉전을 치르던 딸과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영화 ‘이립잔치’ 스틸 사진

◆ ‘가족’이기에 논리싸움으로 해결되지 않는 아이러니의 대결전

영화는 한국사회에 속한 관객들이라면 대개 익숙할 법한 가족 내 세대갈등을 핵심소재로 삼았다. “이립”의 순간, 즉 딸인 유영이 30살이 되는 시기는 그 한창 전에 본인이 스스로 상상해봤음직한 모습과는 거리가 한참 멀 테다. 누구나 어릴 적 자신의 미래를 장밋빛 청사진으로 한번 떠올려보지 않았으랴. 대개 20살이 되어 성인 자격을 얻음과 동시에 대학생이 되면 해보고 싶은 것들이 한 가득이다. 그리고 30살이 되면 자립해서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있으리라 꿈에도 믿어 의심치 않았을 테다.

그러나 2020년대 한국사회 현실은 그런 꿈과는 전혀 다른 온도로 찾아오게 마련이다. 요즘 30살에 자기 기반을 온전히 이룩하는 건 성공한 삶의 기본조건으로 대접받을 정도로 좁은 문이 되어간다. 자식은 자기처럼 안 살기를 바라며 희생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엄마는 아직도 온전한 터전을 마련하지 못한 30살 자식이 못 미덥고 시원찮게 느껴진다. 뭘 해도 믿음직해 보이는 구석이 하나 없다. 그런 엄마의 차가운 시선을 느낄 수밖에 없는 딸은 매사가 간섭으로 다가올 따름이다. 급기야 제발 내가 무엇을 하든 신경 꺼주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스스로 일가를 이루지 못한 처지인지라 당당히 나서기보단 그저 짜증을 부려가며 위축될 뿐이다. 그런 속마음을 들킬 새라 딸은 더 적극적으로 퉁명스럽게 엄마에게 대응한다. 엄마 또한 지지 않는다. 한층 더 꿍하게 대응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딸의 행적을 뇌리에 쌓아놓고 틈만 나면 끄집어낸다. 이러니 모녀 싸움이 터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영화 ‘이립잔치’ 스틸 사진

그럼에도 이 모녀에겐 지나온 세월을 단 둘만이 이해하는 공유지대가 존재한다. 가부장을 내보낸 채 딸을 뒷바라지해온 엄마와 부모에게 큰 도움을 얻지 못한 채 홀로서기에 나선 딸의 단출한 가족은 아직도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4인 구성 ‘정상가족’ 형태와는 거리감이 상당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모녀 가정으로 살아온 이들 둘은 서로 입 비죽 나와도 의지하며 살아내야만 하는 조건이다. 서로 너무 잘 알기에 역설적으로 기대치와 요구가 많기도 할 테다. 내가 이렇게 배려하고 양보하는데 속 몰라주는 상대가 더 미운 법이다. 누군가는 그래도 날 이해해주고 배려해주기를 바라는 게 당연한 두 사람, 세상살이에 지친 친구 같은 모녀는 결국 서로에게 무언가를 애타게 갈구하는 중이다. 둘은 서로 대단한 걸 바란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살이란 갈수록 험난해져 간다. 크게 물려받은 조건이나 여유 없이 여러 핸디캡을 감내하며 한 부모 가정으로 딸을 키워낸 뒤에도 자식 도움 안 바라고 자기 생계를 스스로 유지해온 엄마와, 외지에서 근근이 독립해 살아가는 딸이 사회생활에 치인 고단한 상태로 가족에게 남겨둘 인내란 빤한 법이다. 그렇게 출발점 한참 뒤늦게 시작해 사회생활에 치이면서 감정의 여력을 모조리 쏟아 부은 뒤 정작 가장 안심할 수 있는 가족 울타리 내에선 텅 비어버린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그저 쉬고 싶은 투정에 고픈 두 사람이다. 집이라는 공간과 가족이라 공동체는 그렇게 최후의 피난처로 남아 있는데도 정작 둘은 서로의 상황을 배려하지 못한다. 종이 한 장 차이란 이런 것일까.

▲영화 ‘이립잔치’ 스틸 사진

◆ 지극히 보편적인 세태를 감독 자신의 경험에 입각해 풀어내다

영화는 그런 모녀의 이틀 동안을 자전적인 소요를 각색해 전달한다. 감독 자신의 잊을 수 없는 비망록을 들여다보는 재미는 직접 경험한 것들에서 출발하기에 꽤나 호소력 있는 근접성을 선보인다. 하지만 유사한 체험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낯설어질 수 있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굳이 타인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좀 더 보편적인 문학적 서사 형태의 전개를 기대한 이들에게는 불친절하게 느껴질 여지도 조금 엿보이는 방식이다. 상황 자체가 난해하다기보다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리라 기대하는 제작진의 태도 때문에 일어날 법한 문제다.

아마 감독은 자신의 ‘오너캐’로 설정했을 딸 유영과 본인의 엄마를 투영한 혜자 역할 캐스팅에 본인이 언젠가 꼭 섭외하고 싶었을 두 배우를 공들여 섭외한 것처럼 보인다. 나머지 배우와 제작진들은 대부분 지역 내에서 충당한 것을 볼 때도 (주인공 모녀역할 배우의 선정은 결정적 한방으로 상정하고 임했을 테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캐스팅 몫만은 감독 본인이 직접 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을까 (관심법으로) 넘겨 짚어본다.

김꽃비&오민애, 한국독립영화계 내에서 신뢰의 아이콘일 두 배우가 낙점되어 역할을 수행해냈다. 모녀지간의 호흡은 꽤 근사한 편이다. 하지만 타 지역 출신 연기자에게 굳이 과장된 방언 연기를 요구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는 하다.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꼭 특정 지역 배경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싶었나 하는 측면에서 2030 독립영화 연출자들이 종종 처하는 양 갈래 길에 봉착하는 상황이다. 몇 장면은 약간은 거친 장면전환 호흡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와 함께 다소 과잉으로 강조되는 토착방언의 ‘튀는’ 측면이 좀 더 정제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툭툭 던지는 것 같지만 감독 및 제작진 또래 세대들은 물론 부모 세대에게도 허허실실 다가갈 작품 속 상황과 풍경들은 부드러운 빗방울이나 밤의 이슬처럼 마음에 스며들어간다. 영화에 담긴 마음이 이심전심 전해지기 때문일 테다.

<작품정보>

이립잔치 30th birthday
2022|한국|드라마|29‘22“
감독 남가원
출연 김꽃비(유영 역), 오민애(혜자 역)
PD 박재현
촬영 고현석
조명 김태형, 고현석, 전상진(컬러플러스)
편집 남가원, 박재현
미술 김재은, 장주선
동시녹음 박송열
조감독 감정원
스크립터 류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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