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전쟁을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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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의 개전일은 2022년 2월 24일이다. 하지만 1991년 소비에트가 해체하면서 민족·역사·종교 등의 온갖 변수에 따라 국가와 국경선이 재조립되기 시작한 옛 소비에트 영토와 동구권에서는 개전일 없는 전쟁이 무수히 진행 중이다. 독일의 정치학자 헤어프리트 뮌클러는 『새로운 전쟁』(책세상, 2012)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전적인 국가 간 전쟁에서는 선전포고나 평화협정 체결 등의 법적 행위에 의해 전쟁 상태와 평화 상태가 분리되었고, 전쟁과 평화 사이에 제3의 상태가 없었다. 이와 달리 새로운 전쟁들에는 명확히 구분하여 표시할 수 있는 시작과 끝이 없다.” ‘하이브리드 전쟁’으로도 불리는 이 전쟁은 국가 간 전쟁인지 내전인지를 구분하기 어렵고, 전투원과 비전투원이 구분되지 않는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를 병합했을 때 미국과 서방은 대러시아 경제 제재로 대응했는데, 총 소리가 나지 않는 경제 제재 또한 하이브리드 전쟁의 일부다. 미국과 서방은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와 전쟁 중이다.

근대 국가는 무력을 독점함으로써 권위와 정당성을 누린다. 국가가 전쟁을 벌이면서 자국의 국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아니라 사적인 무장력을 빌려 쓴다면, 이미 그 나라는 정상국가라고 하기 어려운데다가 전쟁의 명분마저 크게 퇴색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는 민간군사기업인 와그너 그룹의 용병을 전선에 대거 투입했다. 서방의 언론은 러시아 군의 선봉을 맡은 와그너 그룹의 용병을 자주 부각시킨다. 이런 선전전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푸틴과 그의 측근이 세운 와그너 그룹의 잘못된 결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축소한다.

민간군사기업이 가장 발달한 곳도, 민간군사기업에 전투를 맡기기 시작한 곳도 미국이다. 9·11 이후로 미국은 군대의 민간화를 사업을 계획했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벌인 미군의 군사작전에 늘 등장하는 블랙워터는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의 지원 아래 급성장했다. 제러미 스카일은 『블랙워터』(삼인, 2012)에서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진 미국이 민간군사기업을 부양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부시 행정부의 점령과 침략 전쟁의 확대를 막는 주요한 장애는, 군사 인력의 부족과 부시 행정부의 간섭으로 야기되는 점령지의 저항군이었다. 침략 전쟁에 대한 국내의 반대 여론은 군대에 복무하려는 지원자들의 감소로 귀결되었는데, 이와 동시에, 미국 정부는 미국의 전쟁과 점령에 대한 국제적인 반대 여론으로 우방국 정부의 지지를 요구하거나 설득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그러나 민간군사기업이 있다면 그러한 경향들은 극적으로 바뀔 것이었다. 전쟁에 필요한 군인을 징집할 필요도 없고 전쟁에 대한 국내의 지지 여론도 필요 없으며, 전쟁을 거들어줄 ‘자발적인’ 국가의 연합도 필요 없다.” 미군 전사자가 많이 생기면 국내 여론이 나빠지는 것과 함께 유권자의 표가 떨어진다. 또 미군이 현지 양민을 학살하는 것보다 용병이 자행하는 학살이 더 안전하기 때문에 미국은 군대를 외주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 강대국만 민간군사기업의 단골인 것은 아니다. 피터 W. 싱어는 『전쟁 대행 주식회사』(지식의풍경, 2005)에서 냉전 종식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분쟁이 대규모로 증가했다면서, “1989년 이후 많은 이들이 세계 평화라는 ‘신세계 질서’를 기대했지만, 냉전 종식 이래 내전 발생 건수가 두 배로 많아졌으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거의 다섯 배로 뛰었다”고 말한다. 시장은 널려 있다. 신흥 국가나 제3세계의 권력자들은 민주적인 수단보다는 무력에 의지한다. 아프리카의 최빈국은 현금 대신 광물 채굴권 같은 사업권을 주고 용병을 산다.

민간군사기업은 목숨을 팔려는 양질의 용병이 있어야 하는데, 냉전 종식은 수많은 퇴역 병사를 용병 시장에 내놓았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빚어낸 양극화는 목숨 밖에 없는 “거대한 예비군”을 형성해 놓았다. 국가보다 커진 무력은 민주주의와 국민의 인권을 위협한다. 예브게니 프리고진 와그너 그룹 수장은 푸틴의 후계자 그룹으로 물망에 오르내린다. 미국의 민병대,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도 사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