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저주도 처벌하는 저주스러운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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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년 새해 벽두, 예안 고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에서는 심상치 않은 초상이 발생했다. 이종배와 그의 아버지가 시차 없이 갑자기 사망했다. 동시에 아들과 아버지가 사망했으니, 우연보다 필연적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당연하다. 유족 입장에서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며, 그래서 그 원인을 찾기 위한 노력은 당연하기까지 하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려는 생각은 위험천만하지만,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은 오씨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양반 아녀자가 행할 수 있는 권력이라야 집안 노비들이 전부겠지만, 그녀는 이를 최대한 활용했다.

예나 지금이나 오지인 예안 고을에 중국인으로 알려진 장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실제 그의 국적이 중국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안 고을까지 흘러든 낯선 이가 점술가라는 캐릭터로 정착하는 데에는 국적문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평소 고을 사람들 대상으로 부적을 써 주면서 생활을 연명했는데, 그가 지나가는 말로 ‘아무개가 한 짓’이라고 오씨를 부추겼다. 안 그래도 의심병이 도질대로 도졌던 오씨에게 이 말은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할 명분이 되었다.

장씨가 오씨에게 전한 그녀 남편의 사망원인은 ‘저주’였다. 누군가 이종배와 그의 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저주를 퍼부어 한날한시에 사망했다는 추정이다. 현재 관점에서야 욕이 어떻게 배를 뚫겠냐고 생각하겠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 욕이 사람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주라는 게 마음의 소리인 탓에 이를 증명할 증거를 찾아 입증하는 게 쉽지 않았다. 오씨의 의심과 점술가 장씨의 말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문밖에 없었다.

죽은 이종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집안 종 이평과 그의 딸 춘홍‧산홍이 잡혀와 마당에 무릎을 꿇었다. 고문은 가혹했다. 차라리 관아라면 법에 따른 신문의 원칙이라도 있지만, 오씨의 사감(私感)에 의한 고문은 이러한 원칙을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고문이 시작된 순간부터 이미 이평은 남편을 죽인 원수였고, 이 때문에 고문과 형벌은 구분되지 않았다. 고문 끝에 이평과 그의 딸 춘홍‧산홍이 사망했고, 이들과 연루된 사람들까지 복수 대상이 되었다. 10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고문의 벽을 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씨의 폭주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문은 없는 일도 만들기 마련이다. 춘홍이 목숨을 달리할 정도의 고문을 받다가 시집간 동생 연홍의 이름을 들먹인 이유였다. 연홍은 시집가기 전부터 상전 이종배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종배는 종종 폭력으로 연홍을 대했고, 연홍은 이를 견디다 못해 첩의 자리로 시집을 갔다. 춘홍은 이 일로 자신과 가족들이 7년 전부터 이종배를 저주해 왔다고 밝혔다. 기실 저주할만한 일이기도 했다.

시집 간 연홍이 저주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씨는 이를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연홍에게도 신문을 가장한 극한 폭력이 가해졌다. 그러나 아버지와 언니들의 죽음을 목격한 연홍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고문 끝에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체념한 듯한 연홍의 태도는 오씨의 분노를 키웠고, 오씨는 자신만큼 연홍을 슬프게 만들기 위해 연홍의 어린아이를 강에 던져 버렸다. 천인공로할 일이었다.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던 고을 사람들 사이도 처음에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이제는 해도 너무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기록은 마무리가 이상한 B급 드라마를 보는 것만큼이나 허무했다.

결론적으로 관아에 갇힌 것은 연홍이었고, 관아는 고문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적 죽음의 책임을 오씨에게 묻지 않았다. 장씨의 예언과 춘홍의 자백으로 연홍은 상전을 저주했다는 죄가 인정되었다. 예안현감은 이 사건을 이평과 그 가족들 저주에 의해 이종배와 그 아버지가 사망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고문 과정에서 발생한 죽음은 그러한 죄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일어난 피치 못할 피해 정도로 정리되었다. 게다가 이들 신분이 노비였기 때문에 주인의 1차 처분권을 관이 인정함으로써, 고문을 당한 노비들의 죽음도 그렇게 종결되었다. 여기에 아이를 죽인 오씨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공분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이 기록은 조선의 엄밀한 형사 시스템을 강조했던 필자마저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이 사건은 저주를 유죄로 인정하는 독특한 관념에 조선 신분제가 보태져 만든 결과이다. 도덕적 인간의 달성을 학문적 목표로 하는 유학은 결과보다 동기를 우선하게 하는 법 시스템을 만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저주는 그에 따른 행동이 없는 한 이는 순수한 동기에 불과하다. 윤리 문제이기는 해도, 현재 법 시스템에서 이를 법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나 동기를 중시하는 유학은 이를 사회 근간을 흔드는 악독한 범죄로 규정했고, 실제 다른 이유로 죽어도 누군가의 저주가 있으면 저주에 의한 죽음으로 정리했다. 노비가 상전을 저주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한 이유였다.

마을 사람들마저 공분했던 상식이 법적 판단에서 제외된 이유이다. 게다가 현감 입장에서, 국가의 백성이 아닌 사유재산에 불과한 노비들 처분에 국가가 개입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노비에 대한 국가 개입이 달가울 리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이는 어린 아이 죽음에 대해 공분했던 고을 사람들의 상식과도 결을 달리한 이유였다. 원래 상식은 모두의 일상적 생각이다. 그러나 유교 이념에 신분제가 합쳐지면, 죄 없는 어린아이 죽음마저 무시하는 새로운 상식이 만들어졌다. 신분이나 계층에 따라 다른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상식을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동일한 죄라도 각각의 계층에 따라 그 크기와 모양, 그리고 대상마저 달리했다. 신분제가 없는 ‘듯한’ 우리 사회 어디에선가 본 듯한 이상한 상식은 이렇듯 오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