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무늬만의 개혁’이 무서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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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음력 7월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무관 노상추에게도 충격이었다. 보름 전까지도 멀쩡했던 정조가 그해 6월부터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 사망에 이르자, 합리적인 노상추마저 독살을 의심할 정도였다. 그만큼 노상추를 비롯한 정조의 사람들에게 정조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당연히 그의 죽음은 국왕 호위부대 금위영의 고위 관료였던 노상추에게는 좀 더 직접적이고 빠른 현실로 다가왔다.

정조가 사망한 그해 12월, 홍주목(현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 소속의 홍주영장으로 발령이 났다. 중앙정계로부터의 축출이었다. 홍주에 내려온 지 2개월쯤 지난 1801년 음력 2월 12일, 노상추는 며칠 동안의 내용을 묶은 조보를 받았다. 조정에 있을 때는 매일 받아 보던 조보였지만, 조정과 그리 멀지 않은 충청도만 해도 조보는 이렇듯 며칠에 한 번씩 전해졌다. 조정에서 밀려난 지 얼마 안 되어 조정 소식에 예민한 무관 노상추에게는 굼뜨기 이를 데 없는 조보였다.

조보를 받아든 노상추는 그제서야 서울에서 노비안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의 구체적 내용을 알게 되었다. 왕의 윤음(왕이 백성들에게 알리는 가르침이나 명령)으로 내수사를 비롯한 여러 궁 소속 내노비(內奴婢) 3만 7천여 명과 각 관서 등에 소속된 시노비(寺奴婢) 3만여 명이 양민이 되었다. 6만 7천여 명의 공노비들이 천민 신분에서 양인이 되었다. 순조의 윤음에 따르면 이는 내노비와 시노비를 혁파하려 했던 선대왕(정조)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었다. 정조도 그가 즉위하던 해 도망간 노비 추쇄를 금한 적이 있었는데, 순조 역시 이를 본받아 모든 백성을 긍휼이 여기는 정신으로 공노비를 없애기로 했다는 게 면천(免賤)의 이유였다. 1801년 1월 28의 일이었다.

노비안을 불태운 일은 이 윤음에 따라 이루어진 첫 번째 조치였다. 왕은 승정원에 명을 내려, 조정과 모든 관서에서 관리하는 노비안을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불태우게 했다. 노비 명단을 적은, 노비 관리 원장에 해당하는 노비안을 불태우는 일은 노비 혁파의 상징적 행위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이날 기록에 따르면, 내수사를 비롯한 각도와 여러 궁에 소속된 36,974명의 노비 명단을 기록한 160권의 노비안이 불태워졌다. 더불어 각 관서 및 성균관 등에 소속된 29,093명의 노비 명단이 기록된 1,209권의 노비안도 함께 불태워졌다. 즉위 1년 차 어린 왕(순조)이 행한 대대적인 개혁이었다.

일종의 재산이자, 각 관서나 궁의 재정 일부를 감당했던 공노비의 혁파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 이들 공노비는 각 관청의 자질구레한 노동을 담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독자적인 가정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속한 소속 관서에 노역을 제공하여 경제적 소출을 만들거나 또는 노동의 대가가 만든 결과를 세금의 형태로 내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이들은 국가나 소속 관서의 노동력과 재정 일부를 담당했다. 노동력이 곧 경제력이었던 시대에 노비를 없앤다는 것은 그만큼의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노비들이 낸 공물을 재정으로 사용했던 관서에는 장용영에서 이를 대납하게 하여, 재정 손실을 막으라는 명도 함께 내려졌다.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개혁이었다. 조정의 입장에서는 개인 소유인 사노비를 대상으로 하는 대대적인 신분제 혁파는 불가능했지만, 조정의 힘으로 가능한 공노비만이라도 혁파함으로써 개혁 정부로서의 입지를 확보했다. 6만 7천여 명이 넘는 공노비에 대한 대대적인 혁파는 신분제 전체에 충격을 주었고, 그만큼 새로 즉위한 순조 역시 개혁 군주로서의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선대왕의 유지를 잇기 위한 조치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선대왕과 다른 개혁적인 정책을 통해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려 했다. 당연히 이는 어린 순조를 보위하면서 대리청정했던 정순왕후의 생각이었다. 개혁의 이미지에 가려진 또 다른 의도가 의심되는 이유였다.

돈화문 앞에서 수천 권의 노비안이 불타고 있을 무렵, 정조의 사람들은 중앙정계로부터 하나 둘 내쳐지고 있었다. 영남 남인을 향했던 왕의 따뜻한 시선은 완전히 완전히 사라졌고, 다시금 기호 노론 중심의 권력 구조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영남 남인에 대한 정조의 따뜻한 시선을 만들었던 채제공은 무덤에서 재소환되었다. 사망한 채제공에게 주어졌던 모든 관직을 삭탈하고, 그의 제자 정약용이나 이가환 같은 인물들을 천주교와 관련된 혐의로 죽거나 축출되었다. 신유박해는 겉으로는 천주교에 대한 배척이었지만, 그 실질적 목표 가운데 하나는 정조의 사람들과 영남 남인들이었다.

노비제나 노예제와 같은 신분제는 노동은 싫지만 노동의 결과(이익)는 모두 갖고 싶은 원초적 욕망의 발현이다. 목화를 따는 노동은 싫지만, 목화 생산을 통해 얻는 이익을 모두 가지고 싶은 욕망이 미국 노예제를 움직였던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노동만 하고, 누군가가 그 노동이 만든 이익을 모두 가지도록 구조화하고, 그러한 구조가 혈연을 통해 세습되도록 만든 게 신분제의 본질이다. 따라서 신분제의 혁파는 이익을 점유한 사람들의 결단이 없는 한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공노비에 대한 점유권을 가진 조정의 면천 결정은 그래서 파격적이다. 새롭게 즉위한 왕이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보임으로써, 선대 왕과 차별성을 부각 시키기에는 이만큼 파격적인 것도 드물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개혁이 항상 ‘개혁 그 자체’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 데 있다. 새로운 왕의 즉위와 함께 이루어지는 개혁은 특히나 새로운 조정의 차별적 이미지만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그러한 이미지는 독점적 권력의 횡포를 가리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개혁이 지향하는 실질적 목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고, 어떤 경우는 전혀 의도치 않는 목표를 만들기도 한다. 1801년 당시 공노비 6만 7천여 명의 면천은 신분제 철폐의 강력한 신호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 조정은 이 이미지 뒤에서 당파도 아닌 몇몇 권문세족들에게 권력을 집중시켰고, 이들의 폭압 정치는 ‘모든’ 백성을 노비보다 못한 삶으로 밀어 넣었다. 무늬만 개혁이 무서운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