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실력만이 통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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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음력 2월 27일, 수도 방어 및 국왕 호위 핵심 부대인 삼영문三營門(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군관들을 대상으로 한 중순시中旬試가 개최되었다. 매월 중순 실시되는 시험이어서 중순시라고 불렀지만, 실제 날짜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다. 중순시는 삼영문에 소속된 선전관과 금군 등 특수군들이 매월 치러야 하는 시험으로, 삼영문 부대들의 경쟁을 통해 실력을 향상시키고 무관의 인사고과를 매기기 위한 시험이었다. 그런데 이 시험에는 삼영문에 속한 권무군관勸武軍官들도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이 시험은 무관 진출을 위한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권무군관이란 지위와 문벌이 좋고 체력이 좋은 무과 준비생들이 삼영문 내에 근무하면서 무과를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직위로, 엄밀하게 말하면 군무군관에 발탁된 것 자체가 특혜였다. 삼영문 소속 부대별로 50여 명씩 배치된 권무군관에게는 급료도 지급되지 않았고 근무에 따른 승진 규정도 없었지만, 이들에게는 권무군관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권무시勸武試나 삼영문 군관들이 응시하는 중순시를 통해 무과 회시 통과의 기회가 주어졌다. 권무시나 중순시에서 급제하면 최종 면접 단계인 무과 전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날 발군의 실력을 보인 이는 금위영 소속의 권무군관 정선鄭選이었다. 정선이 쏜 철전鐵箭 2발이 149보步를 넘길 정도였다. 철전, 즉 쇠화살은 매우 무거운 화살로, 정확도보다는 얼마나 많은 거리까지 화살을 쏠 수 있는지 테스트했다. 국궁의 경우 1보가 1.2m 정도이니, 이를 기준으로 하면 정선은 이날 무거운 철전을 179m까지 쏘아 보냈다. 나무 화살로 정확도를 테스트하는 국궁의 경우 사거리가 120보, 즉 144m정도이니, 그 무거운 화살로 얼마나 멀리 쏜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정말 힘이 좋은 권무군관이었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함께 중순시에 참여한 서울 출신의 권무군관들과 한량들(무과 합격 이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한 무인들)이 정선의 선전을 보면서 그를 집단으로 구타했다. 건방지다는 게 이유였다. 140보를 휙휙 넘긴 그의 활솜씨가 건방질 수는 있었겠지만 그게 집단 구타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금위대장이 직접 나서 주범을 잡아 곤장 9대를 친 후에야 현장은 정리되었지만, 권무군관들과 한량들의 감정은 쉬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선은 구타를 당한 후 쏜 마지막 한 발도 147보를 넘기면서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전체 권무군관 중 1등이었으니, 구타한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형국이었다. 재시험에서도 정선은 세 발을 각각 162보(194m), 149보, 152보를 쏘아 재론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정선의 실력은 충분히 건방질만 했다. 그러나 서울 출신의 권무군관들의 집단 폭행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 권무군관은 발탁 자체가 특혜였다. 무과를 희망하는 문벌 좋은 집안 자제들에게 주어진 자리였는데, 정선은 서울 출신도 아닌데다 당시 집권 세력인 기호 노론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한미한 영남 출신의 인사였다. 그가 어떻게 권무군관이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서울 출신 권무군관들은 평상시 그를 인정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특혜란 특혜를 받는 사람들만의 것이어야 한다는 뿌리 깊은 권위 의식은 무관의 가장 중요한 실력마저 ‘건방짐’으로 치부했다.

다행히 수치로 드러난 객관적 결과까지 어쩔 수는 없어서, 정선은 중순시 1등으로 급제했다. 그러나 그의 급제를 기뻐한 사람은 같은 선산 출신의 무관 노상추밖에 없었다. 다음날 이 소식이 왕에게 보고되자, 정조 중순시에서 급제한 군관들을 직접 대면하고 치하했다. 정조는 이미 보고를 통해 정선의 실력을 확인했을 터였다. 28세의 정선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실력으로 왕을 친견하고, 자신이 선산 사람임을 밝혔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정조는 그를 특별히 선전관에 임명하라고 명했다. 주위에서 아직 선전관 천거(이를 남행천南行薦이라고 한다)를 받지 못했다고 보고했지만, 정조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 선전관이 되도록 조치하라고 당부했다. 당파나 지역을 넘어 실력을 중시하는 왕의 입장을 확실히 드러냈다.

사실 영남의 한미한 집안 출신 무사가 활솜씨 하나로 선전관에 드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문과의 경우 정기 과거 시험인 식년시를 통해 3년에 33명만 뽑아 인재를 관리했던 것과 달리, 무과는 군 병력 관리 차원에서 많이 선발하는 게 관례였다. 오죽하면 무과를 만과萬科(만명이나 선발하는 시험)라고 불렀을까! 이 때문에 무관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무과 합격보다 더 어려운 단계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선전관에 천거[이를 선천宣薦이라 불렀다]’되는 일이었다.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무과 합격자 가운데 선천에 드는 경우는 채 10%도 안 되었고, 그 가운데 영남 출신은 2~3%도 안 되었다. 선천이 개인의 실력보다는 가문이나 당파와 같은 배경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정선을 선전관으로 임명하라는 왕의 명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시기, 동시대 전 세계와 비교해도, 조선만큼 실력 중심의 인재 선발이 이루어진 사회도 많지 않았다. 아무리 가문이 뛰어나고 지위가 높은 부모를 배경으로 두어도, 실력 없이 과거 시험을 통과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기록은 동시에 실력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상사회 실현이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잘 보여준다. 어떤 사회도 모든 경쟁자가 동일한 출발선에서 출발하는 경우는 없으며, 이는 조선시대보다 훨씬 더 평등이 구현된 현대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출발선을 가장 공정한 것으로 여기며, 그 선을 공정의 조건으로 여긴다. 이들은 자기보다 앞선 출발선에 대해서는 불공정하다고 공격하면서, 동시에 자신보다 처진 출발선에 서야 할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하면 ‘건방짐’을 이유로 집단 폭력을 행사했다.

정선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났다고 해도, 그에게 왕이 없었다면 자신의 출발선 하나도 제대로 지키기 힘들었을 터였다. 실력과 능력만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이다. 실력을 갖추는 과정 자체가 공정하지 않은 데다, 개별 경쟁 과정에서도 여전히 태어난 배경과 환경이 작용되기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불공정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불공정함은 단순히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