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이상한 희수연’, 영화 판 우공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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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영화’는 청년세대의 전유물인가에 대한 실증적 답변

영화계가 비명을 지른다고 연일 미디어에서 속보가 뜨는 중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얼어붙었던 극장가가 부활을 꾀했으나 영 신통찮다며 이러다 한국영화 고사 위기라는 절박한 타이틀이 떠오르지만 어째 반응은 시원치 않다. 20세기 말, 수입 직배영화 때문에 한국영화 기반이 무너질 위기라며 일어났던 스크린쿼터 사수운동은 격세지감 그 자체가 된 상황이다. 온라인 게시판 실시간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다. 코로나19 핑계도, 한국영화 위기론도 갖다 붙이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다. 현재의 위기가 과연 ‘한국영화’의 위기인지, 아니면 상업영화 또는 복합상영관 극장체인의 위기인지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물론 상업영화와 복합상영관의 위기를 한국영화 전반의 위기로 간주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일단 복합상영관의 대명사인 3대 극장체인이 90%대의 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기에 CGV나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중 한 곳만 무너지더라도 어떤 지역엔 극장 자체가 소멸할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업영화를 제외하면 독립예술영화의 점유율은 2% 수준도 미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당장 상업영화 티켓 수입에서 3%가 영화발전기금으로 납부되어 독립예술영화도 일정한 수혜를 받아왔기에, 기금이 고갈되면 기존에 독립예술영화가 받던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사업이 위태로운 것만 해도 분명 전반적인 위기임을 부정할 수 없다.

혹자는 상업영화의 위기일 뿐, 독립예술영화가 다양한 작업을 선보일 기회 아니냐고 일갈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오래전부터 독립영화 또한 정체되거나 성공사례를 답습하며 획일화되고 있지 않느냐는 내부 고민이 이어져 온 걸 보면 위기는 위기임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독립영화가 과거와 달리 독립예술영화 전용극장을 중심으로 극장 개봉에 치중하고 있지만 유의미한 상업적 성공 사례를 거의 선보이지도 못하면서 독립영화다운 다양성과 실험적 면모 또한 평가받지 못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저 청년세대 감성에 맞춰진 소재와 스타일에 공적 지원에 의존하면서 일반 관객과는 유리된 작업만 선보이지 않는가 하는 비판은 귀담아들을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독립영화’는 그 특유의 이미지 때문에 청년세대가 향유하는 대상으로만 종종 인식되곤 한다. 기존 상업영화의 관성과 형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소재와 방법론은 물론 자유로운 표현 수위를 구사하는 독립영화란 존재는 왠지 기성세대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온전히 그렇게 구분되는 게 정당한지 물음표가 남는다. 생물학적 나이로 세대를 구분하고 특정세대의 문화적 기호와 가능성을 국한하는 게 그저 분류의 용이함을 넘어 어쩌면 상업적 수요를 설정하고 소통의 단절을 초래하진 않나 짚어봐야 할 지점이다.

▲영화 ‘이상한 희수연’ 스틸 이미지

이번에 소개하려는 영화의 제목은 <이상한 희수연>이다. ‘희수’란 무슨 뜻일까? 10년 단위 기준의 환갑이나 회갑과 비슷한 것도 같지만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찾아보니 ‘희수喜壽’. 77살을 뜻하는 한자어다. 이 영화가 2022년 제작이니 세는 나이로 극중 희수를 맞이한 주인공은 1946년생 개띠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이 단편영화의 주인공인 ‘문영’은 해방 직후 태어나 유년기에 한국전쟁과 지독한 궁핍을 겪은 뒤 4.19혁명과 5.16쿠데타, 베트남 전쟁 파병과 중동 건설 붐, 유신독재와 12.12 쿠데타에 5.18과 87년 6월 항쟁까지 다 목격한 것은 물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까지 수행해 낸 세대인 것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산업화와 민주화를 공히 경험하고 이뤄낸 한국현대사의 이름 없는 주역 그 자체인 셈이다.

◆ 희수 잔치와 장례식의 기묘한 결합이 선보이는 화두

하지만 이제 사회적으로 온전히 고령자에 속하게 된 주인공 ‘문영’은 다행히 근래 문제가 되는 노인빈곤문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점점 외롭고 쓸쓸해지는 건 도리가 없다. 그의 주변에서는 끊이지 않고 지인들이 하나둘 사라져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주인공은 다른 가족들이 칠순 때 아쉬웠다며 정성껏 준비하는 희수연 행사 한 달 전부터 모종의 준비에 들어간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그가 벌이려는 ‘거사’의 준비동작이 조금씩 펼쳐지는 중이다. 가족들, 특히 외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선택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 그는 아직 건강해 보이는 본인 자신의 수의를 맞춘 뒤 집에 가져와 손자에게도 자랑한다. 그리고 사진관에 들러서는 뜬금없이 자기 영정사진을 촬영한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희수연 초대장 대신에 멀쩡한 자신의 부고장을 날린다. ‘백세시대’에 충분히 10년은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도 왜 이런 기행을 벌이려는 걸까?

문영은 자신의 결심을 가족들에게 당당히 밝힌다. 하지만 가족들의 반응은 편할 리 없다. 아버지의 제멋대로 행각 때문에 가족은 뭐가 되냐며 격앙된 외아들, 뜬금없는 남편의 결단에 당혹해하는 조강지처 아내, 대체 무슨 의도인지 궁금하기 그지없는 며느리와 손자 앞에서 주인공은 차근차근 자신이 왜 희수연을 그렇게 진행하려는지 의도를 풀어가며 설명한다. 작년에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며 건강할 때 자기 의지로 세상과 작별할 결심을 한 뒤 실행에 옮긴 거장 감독 장 뤽 고다르처럼 ‘조력 자살’을 선택한 건 아니지만, 주인공의 선택은 뭔가 통하는 구석이 있다. 말짱할 때 앞으로 언제 닥칠지 모를 급박한 죽음 이전에 정리할 건 정리하고 매듭지을 건 매듭짓겠다는 결연한 선택이다.

▲영화 ‘이상한 희수연’ 스틸 이미지

가족들은 (아직도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외아들을 제외하고) 주인공의 판단이 일시적 충동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후, 도저히 고집을 꺾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대개 부모 이기는 자식이 없다는데 이 영화에선 부모의 황소고집이 자식을 이기는가 보다. 결국 마지못해 아들까지 희수연 잔치 진행방식에 동의한다. (며느리가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시아버지의 선택에 동의하는데 그 판단근거가 좀 더 묘사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침내 맞이한 희수연 잔치자리. 특별한 이벤트답게 가족들이 직접 차려낸 아담한 행사장에서 주인공은 가족들에겐 덕담을, 오랜 또래 벗들에겐 언제 닥칠지 모를 작별인사를 미리 건넨다. 오랜만에 한동안 소원했던 친구와 재회하는 순간은 말보다는 표정과 손짓으로 대화가 이뤄지는 풍경을 근사하게 선보이기도 한다. 그 희수연 잔치의 마지막은 적당히 열린 결말처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된다. 예상 가능한 빤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영화의 결말 이후 주인공의 운명을 관객이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주인공의 마지막 표정은 그가 원하던 바를 거의 온전히 얻어낸 것처럼 만족스러워 보인다.

<이상한 희수연>은 인생의 황혼을 겪고 있는 노인세대의 시선에서 다가올 종말, 즉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를 주제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대개 청년세대가 상상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이미지와 동일한 출발선상에서 시작되지만, 그 결말로 이르는 과정에서 변주를 가미해 극의 흥미를 확보하려는 도전이 부각되는 작업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한국사회 사변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순환처럼 맞이할 수 있기를 꿈꾼다. 세부적으로는 상당히 다르지만, 이 영화가 죽음과 장례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지점은 어째 이청준 작가의 원작소설을,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옮긴 1996년 작 <축제>의 몇몇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 노인세대가 ‘DIY’로 완성한 로컬영화의 개성

▲영화 ‘이상한 희수연’ 스틸 이미지

<이상한 희수연>은 아주 작은 규모의 아마추어리즘 영화다. 전개는 큰 난이도 없이 죽 이어지는 수준에 연출 테크닉이나 연기자들의 활약도 평범함 그 자체다. 노인세대의 고민을 어색하지 않게 녹여낸 점에서 점수를 줄 만하지만, 흔히 표현하듯 ‘영화적 완성도’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엔 (냉정하게 심사하자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작업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강점 또한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이 단편은 지역미디어센터의 지원으로 교육수강생 모임 구성원들이 연출과 배역 등을 소화해 완성될 수 있었다. 27분여 남짓한 단편이긴 하지만 영화를 품평하는 것과 직접 제작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특히 현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투입되는 고도의 전자-광학 장비들을 ‘디지털 소외’라 불릴 정도로 접근성이 떨어지는 고령 제작진이 소화하기란 지난한 과정이었을 테다. 애초에 이 영화를 만든 수강생모임의 출발 자체가 그런 디지털 소외계층을 돕기 위한 교육 워크숍을 기원으로 한다. 그렇게 따져보면 지역미디어센터의 교육계획이 꿈꿨던 궁극의 결실이 바로 이 작업의 완성인 셈이다.

▲영화 ‘이상한 희수연’ 스틸 이미지

물론 수강생모임만으로는 영화가 완성되기엔 역부족이었을 테다. 이야기가 마무리된 후 화면에 올라오는 크레디트 속에서 주역의 자리를 훌륭하게 대미를 장식해준 수강생들에게 넘기고 ‘연출부’, ‘촬영부’ 등의 이름으로 살며시 스며든 교육 강사와 센터 활동가들의 몫이 적지 않았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아마도 주인공의 아들 부부와 손자 외에 출연진 대부분 또한 실제 미디어교육 수강생 아니면 지인들로 빤히 짐작되는 이 단편의 제작기를 상상해보면 완성도 어쩌고 하는 품평 대신에 입꼬리 살짝 올라가는 웃음이 따라붙는다. 투박하기 그지없지만 실제 당사자성을 끌어내 연기의 단조로움을 초과하는 사실감을 막판 끌어내는 뒷심을 발휘하는 몇몇 순간 때문이다.

영화는 우리 사회에서 제사의 고도로 형식화된 과정이 어느새 잊혀져가듯 사라져가는 기념일인 ‘희수’를 매개로 당사자들이 풀어내고 싶었던 화두를 끄집어낸다. 초고령층 진입을 맞이하게 된 한 노인이 자신의 생을 차분히 정리하려는 인생 마지막 도전과정이 펼쳐진다. 그의 도전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통해 이제 퇴장해 갈 세대의 품위 있는 마무리에 대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담히 전하고자 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전통적인 가족형태에 아내와 며느리가 적당히 녹아드는 전형성을 띠는 구성은 익숙한 편이라 조금 더 나아갔으면 하는 욕심도 들지만 그건 현 세대가 풀어내야 할 몫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모두가 익숙하다고 착각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시선으로만 판단하기 십상이)던 이야기를 시작부터 끝까지 지탱하는 주인공의 돌발적인 결단은, 영화의 여러 한계를 보완하는 호기심을 내내 유지하며 결말의 아우라에 도달한다. 독립영화마저 상업영화와는 상이하지만 유사하게 획일화된다는 우려 가운데 다양한 세대와 소수자를 아우르는 지역화 창작모델의 단초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상한 희수연>의 시도는 보다 더 부각되어야 할 사례일 테다.

<작품정보>

이상한 희수연
My 77th birthday ceremony heesuyeon
2022|한국|드라마|28분
감독 문향영
출연 조상용(문영 역), 서월숙(선희 역), 윤진(동찬 역), 정햇님(채원 역),
박지완(지원 역), 오윤석(인규 역), 문향영(상기 역)
촬영 이광재
사운드 이경민, 김원열
배급 대구시민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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