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고작과 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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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의 한 인공서핑장에서 11세 일본인 관광객이 욱일 문양의 서프보드를 타다가 주변의 항의를 받고 서프보드 사용이 불허됐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이 태극 문양을 애용해 왔듯이, 욱일 문양 역시 일본인이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전통 문양이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욱일 문양을 해군과 육군의 군기로 채택하면서 일본의 침략을 받은 한국과 중국에서는 욱일 문양을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처럼 금지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봤자 욱일기는 고작 군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일본을 대상으로 두 차례의 전후청산 절차를 진행했다. 첫 번째는 1946~1948년 사이에 이루어진 극동국제군사재판(일명 도쿄전범재판)이고, 두 번째는 1951년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공식 명칭은 대일평화조약)이다. 두 절차에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이해 당사국 대부분이 참여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들러리에 불과했고, 주도권을 행사한 나라는 미국이다. 두 절차를 주도한 미국은 참가국이 납득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관용을 일본에 베풀었다. 미국은 천황을 전범에서 면제하고 천황제를 온존시켰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때, 군주제를 없애는 조건으로 독일의 항복을 받아준 미국의 태도와 대비된다.

그동안 축적된 연구는 미국이 일본에 관용적이었던 이유를 한 목소리로 설명해 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동서냉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일본 내의 좌익을 억누르는 한편 일본을 동아시아의 반공 보루로 삼으려는 두 가지 목적에서 천황제를 유지하고, 전범에 대한 처벌을 최소화했다. 올해 출간된 리사 요네야마의『냉전의 폐허』(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2023)와 리오 T.S. 칭『안티-재팬』(소명출판,2023) 역시 앞서 도출된 연구의 핵심을 되풀이한다. “많은 중요한 문서 연구가 보여주었듯 연합국들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관용과 일본을 그 지역 반공주의의 주요 보루로 재건하려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만장일치로 지지하지는 않았다.”(리사 요네야마) “미군정과 그 정책결정자들은 일본을 아시아의 ‘경제’ 허브로 만들기 위해 보수적인 일본 정부와 협력하면서 애초의 급진적 무장해제와 민주화 계획을 뒤집어버렸다. 이 계산은 반공 진영을 구축하려는 기획의 일환이었다.”(리오 T.S. 칭)

냉전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부인과 무책임으로 일관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었다. ‘위안부’ 성노예화, 난징 학살, 포로학대와 같은 일본의 대표적인 반인륜 전쟁 범죄는 논의되지 않았다. 731부대의 생체실험도 미국에 의해 은폐되었다. 731부대가 생체실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부랑죄와 항일행위로 기소된 중국인과 한국인 민간인, 그리고 소련 전쟁포로들이다. 마루타(통나무)로 불렸던 실험대상자들은 강제로 병원체를 투여 받거나 세균에 노출되었으며 오염된 음식과 액체를 섭취해야 했다. 731부대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거꾸로 매달기, 죽을 때까지 탈수상태로 만들기, 신장에 말 소변 주입하기, 다양한 신체부위를 얼려 동상 치료법 조사하기, 고압실에 사람을 넣고 관찰하기, 아이들에게 결핵균 감염시키기 등을 실험했는데, 제임스 도즈의『악한 사람들』(오월의봄, 2020)에 따르면 “미군은 731부대원들이 실험에서 모은 정보에 대한 대가로 기소를 면제했고 돈을 지불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3개 추축국 가운데 기존의 국기와 국가를 그대로 사용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독일은 국기를 바꾸었고 국가는 가사를 수정했다. 이탈리아는 삼색기 중간에 있던 사보이아 왕가의 문장을 삭제했고 국가를 새로 만들었다. 자료가 없어서, 어떤 사정으로 독일과 이탈리아가 국기와 국가를 교체하거나 수정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자국의 책임의식과 더불어 주변국(연합국)의 압력(처벌)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작 욱일기가 아니라 정작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일장기다.

리오 T. S. 칭은 현재 한국과 중국의 분출되고 있는 반일감정의 근원이 흐지부지된 두 차례의 청산 절차에 있다고 주장한다. 1991년을 전후하여 냉전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동결되어 있었던 반일감정이 빙산처럼 녹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