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첫 산사태부터 마지막까지 8시간 30분…책임자는 어딨었나

08:47
Voiced by Amazon Polly

경북 예천군 백석리 상백마을 실종자 수색이 한창인 현장을 거슬러 산사태가 흘러온 고지를 향해 올라가 봤다. 민가가 보이지 않을 무렵, 진흙 구덩이를 지나다 두 발이 빠졌다. 깊어야 발치께이겠거니 했으나 허벅지까지 빠져들었다. 한번 빠진 발은 용을 써도 빠져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발 하나를 빼는 데도 진땀을 빼야 했다. 고지를 바라보니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바위와 토사, 아래를 향해 쓰러진 초목을 따라 여전히 빗물이 냇물처럼 흘러내렸다. 허벅지까지 오는 진흙조차 시멘트에 빠진 듯 막막한데, 산사태가 덮친다면? 아득했다.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 만약 지금 산사태가 난다면, 아래에서 구조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산사태가 나기 전에 징후를 감지하고 대피할 방법은 있나. 새로운 형태의 재난 앞에서 알려진 것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힘겹게 빠져나오고선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빗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가다 보니 다시 구조 현장이 나왔다. 경상북도 담당 관계자에게 추가 산사태 발생 가능성에 대해 물으려던 차, 마침 구조대가 산사태에 매몰된 실종자를 발견했다.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여동생이었던 여성이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습됐다. 희생자를 태워 내려가는 구급차를 향해 지역민들이 고개 숙이며 합장했다.

이 참혹한 현장은 명백히 재난 대응 체계 부실로 인한 참사 현장이다. 피해를 좀 더 줄일 기회가 분명히 있었는데, 대응 체계가 없거나 작동하지 않아 피해가 커졌다. 참사 발생 2주 전인 6월 30일, 경북 영주에서 발생한 산사태에 주택이 매몰돼 14개월 된 유아가 사망했다. 영주 지역 누적 강우량이 100~200mm대일 때 발생한 사건이다. 그보다 더 많은 비가 내릴 것으로 충분히 예측된 상황에서, 왜 재난 대응 체계가 좀 더 촘촘히 작동하지 못했나.

15일 사건 발생 당일에도 피해를 줄일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 당시 경북 북부지역 산사태는 산발적으로 시간차를 두고 벌어졌다. 경북소방에 접수된 산사태 관련 신고 중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고를 신고 시각 순으로 살펴보자. ①문경시 산북면(02:36) ②예천군 감천면(02:45) ③봉화군 춘양면(05:00) ④예천군 용문면(05:09) ⑤예천군 효자면(05:16) ⑥봉화군 법전면(05:43) ⑦영주시 장수면(06:10) ⑧예천군 은풍면(06:22) ⑨문경시 동로면(07:14) ⑩영주시 풍기읍(07:27) ⑪예천군 은풍면(09:37) ⑫봉화군 춘양면(11:06) 순이다. 최초 신고부터 마지막 신고까지 8시간 30분의 시간 차가 있다.

최초 신고된 문경시 산북면에서도 실종자가 발생했다. 산지 지역 마을에서의 인명사고 추가 발생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감천면에서도, 춘양면에서도, 용문면에서도, 효자면에서도 계속해서 실종자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마지막 피해 신고가 접수된 오전 11시 6분까지도 주민 대피 명령은 발동되지 않았다. 왜 주민들은 최초 신고부터 마지막 신고까지 8시간 30분 동안 위기의 심각성도, 대피 장소 등 구체적 정보도 없는 안내 문자만 받아야 했나.

최초 인명피해가 확인된 시점에서 책임 있는 단체장이 전면에 나설 수 없었나. 산사태 취약지역이 아닌 곳에서도 산사태가 발생해 인명피해가 났다고, 사태가 심각하니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 주민들은 우선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해달라고, 그렇게 나설 수 없었나. 재난경보 사이렌이라도 울려줬다면, 그렇게 지휘했다면, 1명이라도 더 위험을 회피할 수 있었을 테다.

내년에 산사태가 다시 벌어진다면, 인명 피해가 다시 발생한다면 그때도 안타까운 일이라고만 할 것인가. 참사 직후 만난 지역민들은 하나같이 불안감을 호소했다. 폐허로 변한 이 삶의 터에서 다시 시작한들, 당장 내년에 안녕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기후 위기가 더 진행될 내년은 어떠할까. 그때도 그저 목숨을 천운에만 맡기고 살아야 할까.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국가를 확인할 수 있을까.

수습과 복구로 끝나선 안 된다. 재난 대응 체계의 문제와 책임을 확인하고 지금의 상황에 맞는 체계를 새롭게 꾸려야 한다. 내년 호우가 다시 찾아오기 전에 우리사회는 조금이나마 준비하고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 나라가 호우 탓에 전국 47명이 사망했는데도 그 누구도 나서서 정치적·도의적 책임이나마 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곳이라서, 단 한 걸음을 내딛기가 너무 버겁다.

▲백석리 상백마을을 거슬러 올라간 고지. 2m 가량 높이에 있는 나무 잎사귀에도 토사가 말라 굳어있다. 잎사귀 아래로 상백마을이 보인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